“김 선생 왔어? 어서 들어와.”
시각장애가 있고, 평생을 학교에서 일하셨고, 비장애인과 결혼하여 자녀들을 훌륭하게 길러내신 선배 선생님 댁을 찾았다.
퇴임하신 후에는 1년에 한 번 찾아뵙기도 쉽지가 않다.
두 손을 마주 잡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목소리도 손도 여전히 고우시다.
“우리 김성은 선생은 결혼하지 말고 자유롭게 살아라.
하고 싶은 것도 다 하고, 훨훨 그렇게.”
갓 취업하여 조직의 쓴맛에 눈물 콧물 범벅으로 휘청거렸던 20대 나에게 선생님은 말씀하셨었다.
어렵사리 결혼을 결심하고서 청첩장을 드렸을 때는,
“남편 잘 모시고, 행복하게 살아. ”, 눈물바다가 된 예식장에서는 , “좋은 날에 왜 울어.”.
뭉툭한 한 마디들이 유독 따뜻했다.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남편과 함께 인사를 드렸던 날, 사부님의 명랑한 당부는 이랬다.
“김 선생은 그러지 마요. 뷔페식당에서 나는 자기 음식 챙겨 주느라 하나도 못 먹다가 좀 먹어볼까 하면 그렇게 가자고 성화를 한다니까.”
선생님이 퇴임 인사를 남기고 학교를 떠나시던 날에는 기어이 눈물이 흘렀다.
하염없이 어렵기만 했던 선배셨는데, 30년 세월은 공통분모가 많은 나와 그녀 사이 벽을 고요하고 부드럽게 허물어 놓았다.
“딸아이는 잘 크지? 몇 학년이야?”
“중학교 2학년이에요. 교회에서 찬양대 활동 열심히 하고 사춘기도 왔고요.”
“벌써 그렇게 컸구나. 김 선생이 올해 몇이지? 빠르다.
우리 딸도 일 하고, 아이들 키우면서 글 써.”
“저도 나중에 선생님처럼 딸아이 훌륭하게 키우고, 건강하게 노후 보낼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 있을까요?
사부님과 두 분 행복하고 건강해 보이셔서 제 마음이 너무 좋아요.
저는 남편 미워 보일 때도 있고 그런데….”
“남편 아직 교회 안 다니시지? 김 선생이 전도해야지.
우리 장로님은 주일학교 교사를 몇 십 년째하고 계신지 몰라.
젊었을 때는 일을 더 많이 하셨으니까 밖에서 식사할 일도 커피 마실 일도 많았잖아.
그럴 때마다 나한테 제보 전화가 온다.
선생님, 지금 장로님 누구누구랑 카페 들어갔어요, 누구누구랑 단 둘이만 차 타고 갔어요.”
옆에서 듣고 계시던 장로님이 예의 그 명랑한 목소리로 한 마디 툭 던지신다.
“전화 거는 년들이 이상한 거지.”
“장로님 젊었을 때 춤 배울 기회가 있었는데, 나 생각해서였는지 안 하시더라고.
김 선생 나이는 그런 것도 저런 것도 괜히 신경 곤두서고 그럴 수 있지. 그런데, 아무 일 없었어. 남편이 얼른 믿음을 가지셔야 할 텐데.”
“우리 여보가 아주 시기 질투가 심했어.”
“제가 언제요?”
젊은 날을 회상하는 노부부의 웃음은 추운 겨울 훈김이 오르는 군고구마 보다 따뜻하고, 꽁 꽁 언 땅 속 항아리에서 넉넉히 발효된 동치미 국물보다 시원했다.
“이제 내 기도 제목은 하나야. 한 날 한 시에 하나님 우리 데려가 주셨으면.”
장로님 말씀에 일순 가슴이 뭉클했다.
‘마지막이 가까워지면 저 마음이 될 수 있겠구나.
남겨질 배우자와 자녀 모두를 위한 선택이라면, 과연 저 기도 말고 또 어떤 기도를 올릴 수 있을까?
신앙도 없는 내 남편은 말년에 누구를 의지할 수 있을까?’
부부의 연을 맺고 평생 동고동락하신 두 어른의 존재가 내게는 살아 있는 교과서처럼 느껴졌다. 나도 할 수 있다고 당신들의 삶으로 증명해 주시는 것 같아 괜스레 마음이 먹먹해졌다.
무수한 결함에 모난 결핍까지 눅진하게 녹고 녹아 마침내 ‘사랑’으로 완결될 두 분의 내일이 그저 축복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