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김밀도 씨, 지금 뭐 하고 계십니까?”
“네. 작곡가 장피아노 씨, 저는 저녁 먹으려고 합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수필가 김밀도 씨, 저는 지금 남산을 걷고 있습니다. 오늘부터는 체중 관리차 저녁은 안 먹을 예정입니다.”
“작곡가 장피아노 씨, 눈길이 미끄럽습니다. 괜히 슬라이딩하지 마시고 조심 보행하십시오.”
친한 선배와의 통화 내용입니다. 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실용음악을 전공한 선배가 매거진 기획연재 한 꼭지를 읽은 다음부터 저를 수필가로 호명하기 시작했어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깨물어가며 끝까지 서로를 작곡가와 수필가로 호칭합니다.
선배는 운동인이자 개인 사업가요, 예술인이에요. 매일 아침 PT를 받고, 새벽이건 한낮이건 남산산책로를 혼자 걸어요. 그 자유로운 언행이 얼마나 멋진지 모릅니다.
“모든 생각은 걷는 자의 발끝에서 나온다.”
철학자 니체의 명언처럼 걷는 사람은 사유의 깊이가 남다를 수밖에요.
저도 겨울방학을 맞아 걷기에 진심을 다하는 중입니다. 가급적 모든 업무는 오전에 해결하고 점심 식사 후 두 시간 정도 걷는 루틴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쌀쌀한 기온에도 한바탕 걷고 나면 등줄기에 땀이 흥건해져요. 마음 맞는 활동지원사 선생님과 주거니 받거니 담소하며 걷다 보면 먼지처럼 쌓인 스트레스가 깨끗하게 날아갑니다. 지끈거렸던 골치가 말끔해지고 답답했던 가슴이 후련해져요. 과연 마술 같습니다.
독자님들은 2024년을 맞아 새롭게 시도하는 무언가가 있으신가요?
저는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주최하는 글쓰기 온라인 수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강사님은 물론 열 명 남짓한 수강생들 모두가 시각장애인을 처음 접하는 상황이고 보니 소심한 저로서는 다소 용기가 필요했어요. 8주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무조건 7편 과제를 제출해야 합니다. 솔직히 신작은 두 편을 겨우 제출했지요.
그간 써뒀던 개인 원고 합평과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작가님 피드백이 제가 새로 쓴 글에도 이전에 썼던 글에도 공통된 맥락이 흐른다는 거예요. 미처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다름 아닌 몸과 마음의 괴리.
내 마음은 돌봄이건 선택이건, ‘거침없이 하이킥’이고 싶은데, 몸이 안 따라줄 때 폭발하는 분노, 자괴감, 슬픔이 주된 정서였습니다. 손을 보태기보다는 돈을 보태게 되는 어떤 열패감도 부인할 수 없었지요.
김*민 작가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에피소드를 써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남한과 북한만큼이나 거리가 먼 내 뇌와 발의 간극을 촘촘하게 해부해 보기로 작심했어요. 실험에 몰두하는 과학자의 눈으로 말이지요.
생물학적으로 볼 수 없는 몸을 절대 알 길 없을 이들에게 안 보이는 여자사람 하나가 세계를 접수하는 경로, 방법, 생각, 느낌을 설명하는 것. 의미 있는 일일 수 있겠지요?
한편 「글쓰기 상담소」에서 은유 작가는 이렇게 썼습니다.
“고통을 글로 쓰고 공적인 장에 내놓으면 조금은 담담해질 수 있을 테고, 그런 점에서 글쓰기가 글쓴이에게도 치유가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 일이 내 삶의 지배자가 되는 게 아니라 내가 내 서사의 편집권을 가짐으로써 그 일을 다스릴 수 있게 되죠.”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 82p, 김영사)
내 삶의 편집권을 가지고 싶어서 쓴 글이 저를 치유하고, 지탱합니다.
독자님들의 멘털 관리 혹은 충전 비법이 새삼 궁금해지네요.
쓰고 또 쓰면서 저는 내면을 단련시킵니다. 글쟁이들은 공적 글쓰기를 ‘거룩한 부담’이라 명명해요. 일정 기간 주기적인 마감을 약속하는 연재는 ‘악마와의 계약’이라 일컫지요.
공사를 막론하고 쓰기는 무조건 유익합니다. 감정의 응어리가 한 올 한 올 풀리면서 생각이 가지런해지거든요. 심지어 자기 객관화도 가능합니다.
길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두서가 없어도 좋아요. 비밀일기장을 하나 만든 다음 그놈이 왜 나쁜지, 말하자면 험담을 글로 하는 겁니다. 같은 내용이라도 말이 아닌 글로 쓰게 되면 누군가의 귀한 시간을 빼앗지 않아도 돼요. 소문의 재생산을 염려하지 않을 수 있고,
타인에게 의도치 않게 상처 줄 일도 없으면서 속은 시원해지는 매직을 경험하게 됩니다.
골프나 낚시처럼 장비와 의복을 준비할 일 없고, 스키나 보드처럼 계절을 타지도 않아요.
경제적으로 착하고 어디든 언제든 필기구만 있으면 OK.
정여울 작가는 달리는 버스 좌석에 앉아서도 쓴다지요?
어깨가 빠지도록 무거운 짐가방에 노트북을 넣으면서, 무선 키보드를 손에 쥐고 휴대폰 메모장에 조각난 상념을 타이핑하면서 흔들리는 버스여도 써야 사는 종족을 완벽하게 이해했습니다. 한 줄 일기부터 시작해 보세요. 매력적인 쓰기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