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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도 Apr 02. 2024

내 영혼의 충전제

   

4월입니다. 새로운 학교에 입학하고 낯선 공기에 한껏 긴장돼 있던 몸과 마음들이 한 결 부드러워지는 시점이에요. 딸아이가 중학생이 되어 교복을 입고 등교합니다.

저의 일터에도 건강하게 직장 생활하던 사회인들이 학생 신분이 되어 교실에 모여 앉았습니다.

교내 환경 정보를 몸에 익히고, 세 살 어린아이가 된 듯 한 글자 한 글자 점자를 배웁니다.

조심스럽게 흰 지팡이를 손에 쥐고 복도를 걸어요.

예기치 않은 고난 앞에 절망했던 혼자들이 모여 존재 자체로 서로에게 위안이 됩니다.

활동지원사나 가족이 동행하지 않으면 집밖으로 한 발짝도 떼지 못하는 어른아이들이 매일 아침 통학 버스에 올라요. 집에서 학교로 생활 반경이 확장됩니다.

앞이 캄캄한 절망 속에서 아주 천천히 빛을 향해 첫 발을 내딛습니다.

 독자님들은 어디에서 혹은 무엇으로 쉼을 얻으시나요? 영혼의 충전제라 자랑할만한 비법 한 가지씩은 가지고 계실 텐데요. 휴대폰 잔량이 바닥나지 않을 수 있도록 싱싱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고속 충전기처럼 내 영혼을 넉넉하게 채워주는 강력 충전제를 고민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떠오르는 것은 ‘공간 전환’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폼나게 훌쩍 떠나는 여행이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집에서 학교, 카페, 도서관, 영화관, 공원 등 소소한 공간 전환은 지친 몸과 마음을 환기시키는 데 퍽 효과적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학교 어른아이 학생들의 등하교는 매우 건강하고 감사한 긍정의 시도지요.

비장애인들에 비하면 가성비 떨어지고 우아하기 힘든 걸음걸음이지만 아름다울 수밖에요.

활동지원사, 장애인콜택시, 지하철이나 철도 안내 서비스 등 사회적 권리 영역 안에 있는 도움 인력들이 우리들의 자존감을 지켜줍니다.

두 번째는 ‘만남’이에요. 서로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함께 먹고 웃고 말하는 것 참 소중하잖아요. 이동이 불편한 우리들에게 전화는 크나큰 선물입니다.

멀리 있는 친구와 목소리로 소통하는 것. 전화기만 손에 쥐고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니까요.

시간과 여러 여건이 허락된다면 몸을 움직여 직접 만나 노는 것이 베스트이긴 하지요.

아무리 멀리 있어도 한달음에 달려가서 함께 하고픈 친구는 축복입니다.

내 과거, 현재, 미래의 흑역사를 낱낱이 알고 또 알게 될, 그래서 더 맨얼굴일 수 있는 벗과의 만남은 저를 살게 합니다. 

세 번째는 ‘새벽기도’입니다. 독자님들도 다양한 종교를 가지고 계실 거예요.

저는 모태신앙으로 교회에 다닙니다. 남편은 철저한 무신론자인 관계로 친정 부모님과 우리 모녀만 겨우 주일을 지키는 형편인데, 유독 새벽기도에 대한 열망이 커요. 특히 몸과 마음이 힘들 때는 이른 새벽 집에서 나 홀로 온라인 예배를 드립니다. 가끔 새벽 예배에 직접 출석이 성사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방학 때에만, 그것도 동행이 있을 때에나 간신히 참석하는 새벽기도지만 강력합니다.

지난겨울, 경기도에 사는 후배 집에 놀러 갔다가 오래도록 팟캐스트로만 설교 말씀을 듣던, 제법 거리가 있는 교회 새벽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었어요. 비가 내리는 날이었고, 장애인 콜택시로 이동해야 하는 악조건이었음에도 우리 둘은 즐겁기만 했습니다. 어떤 해방감이 두 여자를 용감하게 만들더라고요.

잠에 취해서도 기어이 엄마를 따라가겠다는 후배 아들 녀석까지 대동하고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예배가 끝난 지 한 시간이 넘도록 장애인 콜택시가 배차되지 않는 거예요. 꼼짝없이 발이 묶였지요. 건물 관리자는 자리를 정리해야 할 시간이 이미 넘어가는데, 우리는 기다릴 곳이 마땅치 않고, 본의 아니게 민폐가 되고 말았습니다. 가시 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한 시간 여를 기다려서야 콜택시에 오를 수 있었어요. 잊지 못할, 젖은 새벽의 기억이네요.

마지막으로 제 영혼의 시작과 끝이 되어 주는 충전제는 ‘가족’입니다. 너무 끈끈한 나머지 거리 두기가 필요한 사람들이에요. 더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차라리 독이 될 수 있는 관계.

딸아이를 향한 제 사랑이 그렇습니다. 아이가 중학생으로 자랐음에도 제 눈에는 여전히 아기 같이만 보이는 거지요. 부모보다 친구가 좋은 나이, 다름 아닌 내가 똑같이 통과해 온 시절이건만, 뭔가 아쉽고, 무턱대고 붙잡고 싶은 그런 마음이 되는 건 어찌 된 까닭일까요?

 일상에서 벗어나는 기쁨, 신선하지만, 결국은 내 집이, 내 가족이 가장 편안하고 만만하고 소중하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네요.

푸르른 새봄, 독자님들의 봄꽃 같은 하루하루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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