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이 오늘 귀 좀 간지러웠지?
올해 누나가 중학교 국어 수업을 처음 맡았잖아.
겨울 방학 때 열심히 공부하는 거 너 봤지?
다행히 요즘은 EBS 교육방송에 음성으로 자막 화면해설이 입혀져 있고, 점자정보단말기도 있어 강의 들으며 필기하기가 훨씬 수월하더라.
그 옛날 누나가 수능 시험을 준비할 적에는 화면해설 같은 건 상상도 못 했는데…
아, 이거 ‘라테’인 건가?
몇 년 전부터 누나가 학령기 학생들을 대하면서 했던 고민이 있었어.
단순 시각장애 학생들, 그러니까 지능에는 문제가 없는데 시력만 안 좋은 친구들이 꿈을 꾸지 않는다는 사실.
딱히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이 그냥 휴대폰 알고리즘을 타고 흘러 흘러 매주 월요일을 맞는 거야.
너도 알다시피 누나는 월요일 1교시를 무척 좋아하잖아?
그냥 학생들과 얘기하고 웃으면서 교과서 읽고, 목청 높여 한바탕 수업하고 나면 본격적인 한 주 출발의 시동이 걸리는 느낌이거든.
매일 시들시들하던 중2 여학생들이 ‘안내견’ 얘기 나오니까 초롱초롱 질문을 쏟아내더라.
한 시간이 훌쩍 갔어.
누나도 모처럼 강산이 얘기하며 추억에 젖었네.
우리 둘이 걷던 길의 향기, 바람, 그 걸음걸음이 비현실적으로 가벼워서 자유했던 시간.
너 귀 좀 간지러웠을 거다.
누나가 강산이 뒷담 한 것은 아니고, 네가 얼마나 영특한 녀석인지 임팩트 있게 설명하려다 보니, 그만….
강산이가 누나 연수하는 사이 숙소에서 3일 치 도시락 사료를 다 뜯어먹고는 누나를 보고 깜짝 놀라 토해 버린 사건, 침대에 올라가면 안 되는 수칙을 어기고 몰래 누나 침대에서 자다가 아닌 척 제자리로 돌아가 앙큼하게 시치미를 떼던 모습, 누나 남자친구가 아무리 인사를 건네봐도 고개를 훽훽 돌려버리던 매몰찬 녀석, 하네스와 목줄을 훌훌 풀고 맘껏 뛰라고 판을 깔아줘도 누나 다리에 딱 붙어 꼼짝도 안 하던 새침데기.
그게 바로 너였는데, 인정?
우리 귀공자, 못 말리는 그 도도함은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자만 뿜어낼 수 있는, 깨끗한 아우라였다.
누나가 “교회 가자.” 하면 “교회”로, “학교 가자.”하면 “학교”로, “마트 가자.”하면 틀림없이 “마트” 문 앞에 나를 데려다 놓았던 요술 같던 친구.
보고 싶네.
벌써 중학생이 된 유주랑 비슷한 또래라서 인지 누나는 중2 여학생들이 참 이쁘고 짠하다.
이 험한 세상을 감은 눈으로 버텨내야 할 언니들이라서...
모처럼 살아 있는 경험을 나눌 수 있어 교실에 활기가 돌았어.
하늘에 있는 강산이 덕분에 선생도 학생도 신명 난 수업 시간이었네.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