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식구 같은 문우님들과 둘러앉아 수필을 공부했어.
더 좋은 글을 짓고 싶은 갈망으로 퇴근 후에 모인 우리들은 유치원생들처럼 선생님 말씀에 귀 기울였지.
“끝까지 몰입도 있게 독자를 끌고 갈 수 있다면 분량은 상관없느니라.
함축과 절제의 미를 살려야 하느니라.
명확한 주제를 잡은 다음 그것을 중심으로 너무 되지도 질지도 않도록 짓는 글밥이 진수니라.
예술의 뿌리는 하나. 카메라 앵글에도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고 하면 오히려 피사체가 흐려지는 것과 같나니 문장과 문단을 가지런하게 단장하는 퇴고가 글의 완성도를 높이느니라.”
열심히 들으면 지식은 흡수할 수 있거든.
그런데, 써놓고 보면 마당 쓸기처럼 끝도 없이 오탈자가 나와.
주제는 흩어지고, 어딘가 붕어빵틀에서 찍어낸 듯한 식상함을 감지하고 보면 별수 없이 스스로에게 질리고 마는 거야.
참신한 글감을 경쾌한 문체로 옹골지게 엮어내고 싶으나, 늘 그렇듯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 간극은 멀기만 하구나.
참! 강산아 소심한 누나가 용기 내어 정남 성우님께 감사인사 전했다.
장애인 등록을 하고 녹음도서를 듣기 시작했던 초등학생 시절부터 소리잡지에서 성우님 목소리를 들었잖아.
어렴풋한 기억인데, 『리더스다이제스트』, 『샘터』, 『도서관저널』, 『소비자시대』 등으로 구성된 월간 소리잡지 테이프가 배달되면 반갑게 듣고 주소 카드를 뒤집어 다시 빨간 우체통에 넣었어. 그렇게 하면 점자도서관으에 반납 처리가 됐었거든.
그때 그 목소리가 글쎄 오늘날 누나가 쓰고 있는 기획 연재 수필 음성 파일본을 낭독해 주시지 않았겠어?
누나 원고를 녹음해 주시는 성우님 목소리가 매번 달랐는데, 정남 선생님 녹음본을 받고서는 만감이 교차하더라고.
아름다운 님들 선행이 우매한 이 맹인의 편협한 사고 지평을 확장시키시는구나.
‘하고 싶은 것’이 있음에, ‘할 수 있는 것’이 있음에 감사할게.
‘할 수 없는 것’에 연연할 시간에 ‘하고 싶은 것’을 하나 더 가져 보려고 해.
그나저나 누나 야간 수업 숙제해야 하거든.
다시 익숙한 ‘벽’이로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