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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도 May 28. 2024

전생에 얼마나 큰 죄를 지었으면

퇴근을 했어.

다친 앞니가 또 말썽이어서 치과에 들렀거든.

한 시간 이상 걸리는 치료라고 해서 예약만 잡고 돌아 나왔네.

강산이 기억나니?

우리 둘이 살 적에 새벽 DT 나가다가 누나 트럭에 정통으로 얼굴 부딪힌 적 있었잖아.

그때 망가진 앞니가 두고두고 속을 썩인다.

지금 생각해도 통행로를 완전히 막고 주차해 둔 트럭 주인에게 분노가 치밀어.

차량 번호판이라도 볼 수 있었어야 신고를 하든 보상을 받든 했을 거 아니냐고.

‘내돈내산’으로 치료받으며 치과 문이 닳도록 병원 다녔잖아.

그때 그 병원을 20년이 지난 지금도 간다.

천사 같은 송원장님이 누나도 강산이도 유주도 형도 다 엄청 잘 챙겨주셨었는데….

원장님 제외한 병원 식구들은 모두 그대로야.

 강산아,  누나랑 많이 닮은 꼴 맹인 언니 있잖아.

동종업에 종사하고 같은 병 진단받았고, 요령 없는 성격까지 비슷한….

전화가 온 거야.

“아야, 너 맨홀에 빠져봤냐?”

“메메멘 홀?  뭔 일이야?”

“내가 오늘 정말 통곡을 했다. 아프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고… 임부들은 119 불러말아 우왕좌왕이고 사람들은 모여들고. 다행히 뼈는 괜찮다더라.”

도대체 전생에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길래 이런 꼴을 당한단 말이니.

남일 같지가 않은 거지.

앞니가 부러져서 임플란트 하고 그것도 모자라 주변 치아 깨져서 두고두고 병원 다니지를 않나, 멀쩡히 걷다가 뚜껑 열린 맨홀에 빠져 갈비뼈 다치고 발목 인대 늘어나서 흰 지팡이를 할머니 지팡이처럼 짚게 되지를 않나, 인도 정중앙에 떡하니 서 있는 킥보드에 얼굴 부딪혀서 안경이 부서지지를 않나, 지하철 플랫폼에서 철길로 떨어져 대퇴골 부러지고 머리 꿰매고….

주변 맹인들 오매가매 부상당한 사건이 수도 없구나.

그나마 이제 지하철역에는 스크린도어가 있어 우리 같은 사람들 다니기 한결 안전해졌어.

 누나 의안도 집에서 청소하다가 다쳐서 응급 수술받았던 거였잖아.

파리 목숨이 따로 없다.

녹내장으로 실명한 안구가 자꾸 혼탁해져서 의안을 고민하긴 했었지만 비용도 그렇고 안구 적출이란 말이 너무 섬뜩해서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하게 될 줄이야.

동네 안과 의사 선생님이 당황하시던 모습이 선하네.

한쪽 안구 파열된 것 같다고, 빨리 큰 병원 가셔야 할 것 같다고.

보이지도 않는 눈에 기백만 원 들이는 것도 가기 싫은 병원에서 먹고 자면서 입원해 있는 것도 얼마나 끔찍했는지 몰라.

피나지 않고, 멍들지 않고, 찢어지지 않고 저무는 오늘에 감사해 볼게.

누나 이렇게 기도하고 싶은데, 안 되겠지?

“하나님 다친 맹인에게 와서 지팡이 잘 썼어야지 말하는 사람들 눈 한 번만 가려주세요.

시각장애인들이 생활하는 공간임에도 안전 조치 안 하고, 사과 한 마디 할 줄 모르는 담당자들 눈물 찔끔 나게 꿀밤 한 번 때려주세요.

2주 진단받았다는 선배 언니 후유증 없이 깨끗하게 나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 DT: dog toilet( 안내견 배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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