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기억의 여행자
시작은 이렇게 하고 싶다. 할 수 있다는 꿈이 가득했던 20대의 여행자.
누군가는 그때의 모습을 무모하다고 얘기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모한 듯, 열정 가득했던 과거의 영혼은 지금 돌이켜 생각을 해보아도 대단한 녀석이었다.
2014년 10월 16일
여권에 새로운 페이지가 열렸다. 스물네 살의 패기라는 딱지이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하여 3년간의 직장생활을 했었다. [출력회사], [광고회사디자이너], [컴퓨터학원 홍보팀] 3년간 옮긴 직장은 아무런 연관성 없는 3곳. 한 곳에서는 1년 6개월을 일하고 다른 곳에서는 1년 미만으로 잘리거나 기분이 상하는 일로 그만두게 되었다. 직장을 그만둘 때마다 들었던 '너는 자유로운 영혼이라'라는 말은 점점 나를 괴롭혔다. 사회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으로 불리는 또 다른 명칭같이 느껴진 탓이다. 앞으로 어딜 가든 이런 일들이 반복될 것만 같다는 불안함은 한국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했다. 이 생각은 발전해서 개성을 수용하는 일본이라면 하고 싶은데로 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이어졌다.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말을 들으면 헤헤거렸던 내가 어느 날부터인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런 내가 싫었다. 계속 자유롭고 싶었다.
"그래! 진짜 자유로운 영혼이 어떻게 하는지 보여주자고!" 그렇게 나는 워킹홀리데이를 다짐한 것이다.
마음먹으면 몸이 바로 움직인다.
젊음이 시그니처였던 그때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나'였기 때문에 새로운 도전은 즐거운 모험과 같았다.
동갑내기 친구가 내게 물었다. '너는 생각하는 데로 바로 움직이는 게 신기해' 그때 당시 나의 대답은 이랬다.
" 생각이 끝났으면 바로 움직여야지. 너도 지금부터 해봐! 넌 뭘 하고 싶어?! "
당시 친구의 놀랍고도 떫떠름 했던 표정이 떠오른다. 뭐 이런 애가 다 있지 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다행스럽게도 그 친구와는 지금도 잘 지내고 있다.
그렇게 나는 8월에 퇴사하여 10월에 워킹홀리데이 확정까지 속전속결로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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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홀리데이라 하면 당시 호주를 많이 떠올렸을 텐데 일본을 선택한 것은 단순했다. 중고생 때부터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다. 스므살 때부터는 퇴근 후 일본어 학원을 꾸준히 다녔고 JLPT2급 자격증이 있었기 때문에 의사소통도 자신 있었다. 패기와 더불어 근자감까지 장착되어 이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었다. 일자리만 구하면 바로 한국을 뜰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정말 무서운 자신감을 가졌던 것 같다.
워킹홀리데이협회가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이곳에서 일자리를 구했는데 화상면접을 보았고 버벅거리며 자기소개를 간신히 한 후 몇 마디의 대화를 주고받고서 난 시골 여관의 서빙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게 되었다. 아, 협회에서 일자리 소개비로는 100만 원이 들었는데 워킹홀리데이를 하는 동안 1년 내내 일자리를 알아봐 준다는 조건이었기에 2~3번 정도는 소개를 받을 수 있겠다 싶어서 지불을 했던 기억이 난다.
도심에서 생활해 보고 싶었지만 주로 일자리를 주선해 주는 자리는 시골이었는데 온천의 여관의 좋은 점과, 자연경관이 좋고, 가끔 도시로 나가서 구경도 할 수 있다고 하는 등 이야기를 해주었다. 서울에서 살았기에 일본의 도심에서도 지내고 싶었지만 일본이라면 어디든 상관이 없을 정도로 기대가 컸었다. 지금 와서 생각을 해보면 시골 여관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은 JLPT2급 정도의 실력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일본으로 떠나는 새벽. 공항버스를 타기 위해서 꾸린 짐을 들고 아빠와 엄마가 캐리어를 같이 끌었다. 1년 동안 보지 못할 딸을 위해 배웅을 나왔다. 어스름풋한 새벽의 색과 공기 속에서 캐리어의 바퀴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깼다. 기분이 묘했다. 어쩐지 이 오묘한 기분은 평생가도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아빠의 뒷모습 사진을 찍었다. 생각해 보니 이 기분과 비슷한 느낌이 떠올랐다. 졸업식에 같이 가던 엄마와 아빠의 모습이다.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식은 다시 내 인생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인 것처럼 이 순간 또한 그러했다.
광화문 공항버스 터미널에서 망치를 두드리는 조형물을 보았다. 매일같이 보는 저 조형물이 내일부터는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또 기분이 묘해졌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왜 무모하다고 표현했을까 생각이 들 수 있다. 용기 있는 행동 정도로 비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진짜 무모함은 이다음에 있다. 여윳돈 100만 원으로 간 것이다. 당시 갖춰야 할 요건에 통장에 돈 500만 원을 증명하는 내역이 있어야 했으므로 500만 원은 있어야 했지만, 엄마에게 잠시 빌렸다가 인증하고 돌려준 후로 정작 소지하고 간 돈은 100만 원뿐이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가족과, 친구들이 많이 물어봤다.
" 료칸에서 식사와 숙소를 제공해 주니가 식비와 집세걱정은 없어. 여차하면 다시 한국에 돌아올 정도의 돈만 있으면 돼" 라 이야기했다. '그래도 그렇지..'라는 표정을 읽었다. 하지만 난 괜찮았다. 정말로 그 정도면 됐으니까 그런데 현실감 없던 나에게 1%의 현실감은 있었나 보다. 비행기가 일본에 착륙하는 순간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륙할 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날 모르는 곳에서 맨땅에 헤딩해 볼 거야라며 미소 짓던 내가 말이다.
[기후 - 다카야마]
지금은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 배경지로도 많이 알려졌다. 비록 일본의 시골이었지만 정말 워홀 협회의 말대로 정겨운 시골 풍경과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유명해서 도시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도 주말마다 등산을 하러 료칸에 머물렀다. 특히 <카미코치>와 <시라카와고>라는 관광지가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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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2편에서 소개할 내용
� 착륙 후 일본에서 의 다짐과 료칸으로 향하며 느낀 감정.
� 일을 시작하고 나서 마주된 현실
� 그 속에서 또다시 꿈을 키워가는 여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