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세상을 다르게 읽기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기(2019.08)

by 사이

드디어, 육지에 발을 디뎠다. 일주일 전 나는 한 여름 더위를 피해 지구 저 북쪽 천년의 추위가 땅에 묻혀 있는 곳, 알래스카를 향하는 여객선에 몸을 실얻었다. 승선을 기다리며 느꼈던 맹목적인 기대감은 여행의 피로에 묻혀 그 기세를 잃은 지 오래다.


하선하는 승객들의 지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과는 다르게 승선을 기다리는 새로운 승객들의 몸에는 흥분과 설렘이 배어 있다. 일주일 간의 항해 후 출항지로 되돌아온 유람선은 하루의 휴식도 없이 또다시 태평양을 거쳐 알래스카로 향할 것이다.


1997년에 상영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타이타닉>이란 영화를 기억한다. 1등실 승객인 여자 주인공과 창문도 없는 3등실 승객인 남자 주인공. 계급이 다른 이 두 사람은 불꽃같은 사랑에 빠지고 타이타닉이 침몰하면서 비극적인 이별을 하게 된다.


젊고 아름다운 남녀 주인공이 뱃전에 서서 바다를 쳐다보고 있는 장면이 유명하지만 개인적으로 내 기억에 남는 장면은 배가 침몰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연주를 하던 악단의 모습이다. 바로 그들. 이 영화 속에는 주목받지 못한 ‘또 하나의 계급’이 있다. 바로 ‘승무원’이다.



일주일 간의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 중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세계 70여 개국에서 모여든 1800여 명의 승무원들이다. 그들은 이 거대한 배 위에서 승객들에게 식사, 음료, 청소, 세탁, 미용, 의료, 쇼, 오락 서비스 등을 제공한다.


그들 중 3600여 명의 승객들에게 삼시 세끼를 제공하는 요리사들의 일과를 살펴보자. 크루즈 안에는 250명 정도의 요리사들이 근무하고 있다. 이들은 오전 6시부터 제공되는 아침 식사 준비를 위해 새벽 4시부터 일과를 시작한다.


이후 오전 11시 점심식사, 오후 5시 저녁식사, 9시 야식까지 하루 네 번의 식사 서비스가 이어진다. 오전 6시에 문을 연 식당은 저녁 11시에 문을 닫지만, 요리사들의 일과는 끝난 것이 아니다. 아직 뒷정리가 남았다. 그들의 하루는 거의 24시간 가동되는 것이다.


이들의 근로 계약은 주로 10주, 4개월, 10개월 단위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10주 동안 일하고 10주 휴식을 하는 계약직도 있으나 대부분의 승무원들은 장기 계약을 선호한다고 한다. 그들은 최장 10개월 동안 배에서 먹고 자고 일하는 것이다.



승무원들의 임금 수준은 높은 편이다. 그러나 이들이 삶에서 소위 우리가 말하는 ‘워라밸’ 즉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퇴근 후 집에 돌아가 휴식을 취할 수도 없고, ‘배’라는 제한적인 공간 속의 거주지는 협소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공동생활까지.


그러나 그들은 웃으며 일한다. 때로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승무원들도 있다. 그들의 근무여건을 고려해 봤을 때 피곤한 것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대부분의 승무원들은 끝까지 서비스 정신을 잃지 않고 일하는 모습이었다. 대체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나오는 것일까.


일주일 간의 낭만적인 뱃놀이를 마친 승객들. 그들은 떠나지만 그 자리는 곧 새로운 승객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승무원들은 지난주와 똑같은 일주일을 ‘새로운 일주일’처럼 일할 것이다. 알래스카의 광대한 자연보다 그들의 치열한 삶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던 여행이다.


여행자는 목적지에 ‘이미 오래전부터 놓여있는 것들’만을 주목하는지도 모르겠다. 시선을 조금만 뒤틀어보자. 보이지 않았던 것들. 가려져 있는 것들을 직시해보자. 여행을 통해 사람이 꽃보다 더 아름다운 이유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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