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 / 박완서
“엄마의 말투는 늘 너무도 자신이 옳다는 확신에 차 있어서 정말 옳은 소리도 우격다짐으로 들렸다. 나는 그게 싫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 p.52)
박완서의 유년 시절 기억을 담은 책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에 등장하는 이 구절에 공감하지 않을 독자는 없을 것이다. 그녀의 작품 속 주인공은 내 어머니 같기도 하고, 할머니 같기도 하고, 동시에 나 같기도 하다.
특히나 ‘소설로 그린 자화상’이라는 소제목이 붙어있는 이 책은 작가 박완서의 인생 이야기이자 동시대를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로 읽힌다. 그녀는 이 책에 어린 시절 고향인 박적골에서 뛰놀던 추억부터 서울에서 겪은 일제 시대 말기와 해방, 6.25 전쟁까지의 기억을 담았다.
소설의 전반부는 고향에서의 생활과 엄마의 손에 이끌려 서울로 이주한 후 척박한 생활에 적응해가는 자신과 엄마에 대한 이야기다. 집안의 장손이자 외아들인 오빠의 교육을 위해 서울에 뿌리를 내린 엄마는 귀향 때마다 어깨에 힘을 준다.
하지만 정작 박완서가 경험한 서울은 산동네의 궁색한 살림과 헐벗은 자연, 곁을 주기 힘든 인간관계뿐이다. ‘셋방살이 법도’를 배우고, 학교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며, ‘이질감’ 속에서 생활하는 그녀.
후반부는 해방과 6.25를 거치며 급변하는 오빠의 삶과 박완서의 가족이 적색분자로 분류되며 겪은 참담한 경험이 주된 이야기다.
“그들은 나를 빨갱이 년이라고 불렀다. 빨갱이고 빨갱이 년이고 간에 그 물만 들었다 하면 사람도 아니었다.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영장이고 나발이고 인권을 주장할 수도 없었다. …… 그들은 마치 나를 짐승이나 벌레처럼 바라다보았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대로 돼 주었다. 벌레처럼 기었다.”(254쪽)
남과 북. 이념이 시대를 지배했던 당시 그녀는 생존을 위해 ‘벌레’가 되었다고 한다. 벌레가 되어 살아남았고, 그 혼란했던 시대를 증언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느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으로 다가왔다. 소설은 여기서 끝이 난다.
작가는 이 모든 이야기를 1인칭 시점으로 서술했고, 서문에서 소설적 윤색을 최소화하고 ‘유년의 기억’에 의지해 쓴 글이고 말했다. 이처럼 구성과 내용이 자서전 형식을 취하고 있음에도 이 책은 ‘자서전’의 느낌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독자도 이 책의 내용이 ‘실제 이야기’인지 ‘가공된 이야기’인지 혼란스러울 것이다. 아마도 작가 박완서가 몸으로 통과한 그 시기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일’이 넘치던 시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시절에는 누구나 죽음과 이별을 경험했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다. 어쩌면, 우리 부모님, 조부모님의 생이 작가의 생에 버금가는 소설일 수도 있다. 그들의 차이점은 박완서는 자신의 기억을 헐어 책을 지어낸 것이고, 다른 이들은 그저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는 점이다.
우리 역사상 최고의 격동기를 경험한 세대가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다. 그 묻혀진 이야기들이 더 많이 세상 드러났으면 좋겠다. 그들의 삶이 글이 되고, 책이 되어 '진실'이 더 이상 왜곡되지 않기를 그 시대의 ‘증언’이 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