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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anii Jun 20. 2016

나의 산티아고記-9

산티아고로 가는 길, 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

그 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나무위키의 '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항목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스페인의 유명한 성지순례길. 순례길의 상징은 가리비와 노란 화살표.

유럽의 여러 가지의 루트로 출발해서 최종 목적지인 스페인의 갈리시아 주에 위치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는 도보순례이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 성 대(大) 야고보가 예루살렘에 순교한 직후, 그의 제자들이 야고보의 시신을 몰래 수습해 돌을 깎아 만든 배(石船)를 타고 이베리아 반도의 갈리시아 지방에 도착했으나 거기에서도 로마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고난을 받던 중, 이 지역을 다스리던 토착민들의 지배자인 루파의 시험을 통과해 갈리시아 지방에 무사히 정착할 수 있게 되었고 거기서 제자들은 야고보의 유해를 제대로 매장하고 갖가지 이적을 행해 로마인들과 토착민들을 개종하는데 힘을 쏟았다.

세월이 흘러 8세기경, 지나가던 주민들이 밤길을 걷다가 밤하늘을 비추어야 할 별빛들이 구릉지의 들판을 맴돌면서 춤을 추는 것을 목격하였고 그곳을 조사하다 야고보의 무덤을 발견하면서 이 지역을 '빛나는 별 들판의 산티아고(Santiago de Compostela)'라 부르면서 성지로 추앙받게 되었다."



산티아고는 성(聖) 야고보의 스페인식 발음이다. 카미노는 길이라는 뜻이니 '엘 카미노 데 산티아고'는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라는 스페인어이다. 순례자들은 흔히 카미노라고 칭한다. 2015년 9월 10일,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의 작은 마을 생 장 피 드 포르(St Jean Pied de Port)에서 출발한 후로 나는 얼굴도 뵙지 못한 이 야고보 성인의 이름을 수도 없이 입에 올리게 되었고, 성당에서, 마을의 동상에서, 가게마다 놓인 엽서와 기념품에서 그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나무위키의 설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정작 야고보 성인은 그 길을 걸은 적이 없지만. 


이 길이 생긴 것은 성지로 추앙받게 된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자들이 전 유럽 각지에서 모여들면서부터다. 순례자들은 스스로를 나타내는 표식으로 조개껍데기를 달고(야고보 성인의 시신을 태운 배에 조개가 붙어 있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지팡이를 짚으며 이 길을 걸었고, 순례자들을 돕기 위해 숙식을 제공하는 알베르게가 생겨났다. 이 순례는 중세 유럽 교회에 의해 장려되었다고 하는데, 이슬람의 침략으로 스페인이 점령당하는 등 성지를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의 반작용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당시의 순례자들은 지금의 후예들이 마주하는 실존적인 번뇌와 달리 생생한 생명의 위협과 맞서 신앙의 힘으로 그 길을 지나야 했다. 이때의 위험은 단지 이교도만이 아니라 야생동물, 강도, 질병, 추위와 굶주림 등등 더 다양하고 실제적인 위협이었다. 


중세의 열정적 신앙의 시대가 지나고, 스페인이 이베리아 반도를 이슬람으로부터 되찾은 후로는 오히려 관심이 줄어들어, 소수의 열성적인 가톨릭 신자들만이 기억하는 길이 되었다. 억압과 위협의 반작용이 어떤 열정이 될 수 있다는, 혹은 열광적인 신앙이야말로 시련과 탄압의 결과일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일반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한참이 지난 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산티아고를 방문하고,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다시 순례자들의 발길이 늘어났다. 보다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이 길을 순례한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쓴 '순례자'라는 소설이 1987년 출간되고 꾸준히 읽히면서부터다.  


나 역시 산티아고 길을 알게 된 것은 '순례자'를 통해서였는데,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에서 온 중년 이상의 순례자들의 경우 그 책을 읽고 순례를 결심했다는 이들이 간혹 있었다.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만 나는 꽤나 오래전부터 걷는 일 자체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순례라는 이 길의 깊은 의미를 따질 것도 없이 오래도록 걸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을 빼앗겼다. 그 후론 산티아고에 관련된 책을 읽고 그 길을 걷는 나를 종종 상상했다. 그러나 정작 그 길에서 가장 많이 듣게 될 질문 '왜 여기에 왔는가?'에 대한 답은 미리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언제, 어떻게 갈 것인가만을 생각했을 뿐이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는 일 년 내내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는다. 순례자는 스페인어로 남성은 페레그리노(Peregrino), 여성은 페레그리나(Peregrina)라고 불리는데(순례남, 순례녀?), 유럽 곳곳에 있는 출발지점의 산티아고 순례협회에서 일종의 여권에 해당하는 크레덴시알을 발급받아 순례자로 다시 태어난다. 이 크레덴시알이 있어야 순례자 전용 숙소인 알베르게에 머물 수 있고, 최종적으로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순례 증명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크레덴시알은 진짜 여권이나 지갑만큼이나 순례자들에게 소중한 물건인데, 나는 순례 첫날 폭우에 젖은 후 크레덴시알이 혹시나 찢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그 무엇보다 조심스럽게 간수했다. 물론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큰 일이기 때문에, 전날 머문 숙소에 크레덴시알을 두고 왔다며 되돌아가는 순례자를 만나는 일도 드물지 않다. 


현대의 순례자들은 크레덴시알을 발급받을 수 있는 주요 지점에서 출발하고, 순례길도 크게 네 개 정도로 되어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이 피레네 산맥을 사이에 두고 스페인과 이웃하고 있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 생 장 피 드 포르에서 출발하는 프랑스 길이다. 스페인 북쪽 해안을 주로 따라 걷다가 갈리시아 지방에서 프랑스 길과 만나는 북쪽 길이 있고, 포르투갈에서 출발하는 포르투갈 길, 스페인 남서부에서 출발하는 은의 길이 주로 순례자들이 걷는 길이다.


하지만 중세의 순례자들은 사실 자신의 집에서부터 순례를 시작했다고 하고, 따라서 실제로는 유럽 전역에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 놓여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잘 알려진 네 개의 길 외에도 순례자 길을 표시하는 조개와 노란 화살표가 그려진 비석이 세워진 길들이 꽤 있다고 한다. 내가 순례를 마치고 친구가 사는 독일의 작은 마을 바드 키싱언에 갔을 때도 숲 속에서 그런 비석을 볼 수 있었다.


작년에 우연히 읽었던 '불멸의 산책'이라는 책은 외교관 출신의 프랑스 작가 장 크리스토프 뤼팽이 북쪽 길을 걷고 나서 쓴 책이다. 바닷가를 따라 걷는 그 길의 아름다움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어 프랑스 길을 걸으려던 계획을 바꿀까 하는 마음이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그 길을 걸으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일단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는 프랑스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어느 길을 통해 걸었든 목적지는 같다. 바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의 목적지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왠지 소박하고, 성스러운 분위기를 기대하지만 이 곳은 공항이 있을 정도로 큰 도시다. 그동안 걸어왔던 숲과 언덕이 아닌 큰 도로와 높은 건물 사이를 지나는 쑥스러움은 그동안 거쳐온 몇몇 대도시에서 이미 겪었던 바다. 차이가 있다면 산티아고 근교에 접근하면서부터 눈에 띄게 따뜻해진 순례자들을 맞는 사람들의 태도다. 순례길에서 만날 수 있는 스페인 사람들 대부분 친절하지만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지나가던 차는 경적을 울려주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부엔 카미노'라고 인사를 보낸다. 


순례자들은 이런 격려와 축하 속에 산티아고 대 성당에 도착해 너덜너덜해진 크레덴시알을 펼쳐 보이고 순례 증명서를 받는다. 시간이 맞는다면 성당의 미사에 참석하는데 미사의 끝부분에 대향로 보타푸메이로가 성당 천장에 매달려 흔들리며 연기를 피워내는 모습을 보며 감격한다. 이제 순례는 끝이다. 


하지만 많은 순례자들이 바닷가 마을인 피니스테라나 묵시아까지 내쳐 걷는다. 혹은 버스를 타고라도 그곳까지 다녀오는 것으로 순례를 마치는데, 중세의 순례자들 역시 바닷가까지 와서 몸을 씻고 죄사함을 받았다고 여기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니 우리는 선배들을 나름 충실히 본받고 있는 셈이다. 차이가 있다면 현대의 순례자들은 이제 기차나, 버스 혹은 비행기를 타고 다음 목적지 혹은 집으로 돌아가지만 오래전 순례자들은 다시 걸어왔던 만큼의 험한 여정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교도, 야생동물, 강도의 위협을 뚫고.


한 달 넘는 시간 동안 길을 나서면 언제나 찾아 헤맸던 노란 화살표와 조개껍데기 문양이 없는 삶으로 돌아오면서 허전함을 느끼기도 한다. 자신도 모르게 두리번거리며 표식을 찾지만 이제는 더 이상 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주는 비석도, 친절한 주민의 안내도 없다. 스스로의 표식을 찾아 떠나야 한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에 가끔 만났던 반대 방향으로 걷는 이들(이들을 위한 표식은 파란색 화살표다. 산티아고에서 출발지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은 그 표식을 떠나지 못해서 걷기를 멈출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순례는 끝났고 더 이상 표식은 없다. 하지만 카미노(길)도 끝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딘가로 여전히 걸어야 한다. 삶이라는 길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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