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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anii Jun 11. 2016

나의 산티아고記-8

좋은 사람, 김순진

그녀와는 참 많이 웃었다.      

순진과 만난 곳은 알토 돈 페르돈. 용서의 언덕이라는 곳이다. 철판에 새겨진 순례자들의 모습으로 유명한 곳이다. 카미노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미지 중의 하나이고, 그래서 엽서에서도 책자에서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곳까지 혼자 오른 나는 The Way라는 카미노를 다룬 영화를 떠올리며 나름 감격스러운 순간을 보내고 있었다. 셀카를 찍는 내게 다가와 “사진 찍어드릴까요?”라며 이야기를 시작한 순진은 나보다 4살 아래. 차이가 난다면 난다고 할 수 있지만 연령대가 넓은 카미노에서는 만나기 힘든, 그나마 같은 세대였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길을 가게 되었다. 딱히 동행을 하기로 약속한 것은 아니었지만 순진과 나는 종종 같은 숙소에 묵거나 같은 곳에서 쉬는 일이 생겼다. 한참을 걷다가 이제 좀 쉬어서 맥주라도 한 잔 할까 싶어 들르면 그곳에서 마주치는 식이었다. 한 번은 각자 따로 길을 떠나 묵게 된 마을에 서너 개 정도의 알베르게 중 더 한적해 보이는 공용 알베르게로 들어가서 침대를 배정받았는데, 열 개 남짓 놓인 침대 중 하나에 낯익은 배낭이 보였다. 물어볼 것도 없이 순진의 배낭이었다. 그 옆에 내 배낭을 놓고 핸드폰을 확인하니 이미 메시지가 와 있었다. “언니, 어디예요? 전 지금 도착했어요.” 그래서 답장을 보냈다. “순진 바로 옆. 뭐해?” “맥주 마셔요.”


짐작 가는 곳이 있어 알베르게 밖으로 나가 맞은편 사설 알베르게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서 순진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흠칫 놀라더니 웃음을 터뜨린다. “바로 옆이라고 해서 ‘어디서 나 보고 있나’ 하고 두리번거렸잖아요!” “ㅎㅎ 순진 바로 옆 침대에 자리 잡았지. 우린 취향이 너무 비슷한 것 같아.” 세대가 비슷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와는 대화가 참 잘 통했다. 해산물을 좋아하는 취향도 그랬지만 책 이야기, 영화 이야기, 여행 이야기 등등 대화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가끔 알베르게에서 식사를 만들어 먹게 될 때면 조개, 홍합이 잔뜩 들어간 파스타를 함께 나누어 먹곤 했다. 파스타 삶은 물을 다시 써야 한다는 것도 순진을 통해서 배웠다. 나는 그동안 파스타를 엉터리로 먹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 아침이면 커피 한잔에 나는 크롸상, 순진은 토르티야를 먹었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걷다가 멈추는 카페에서 종종 맥주를 마시곤 했다. 사실 약간의 술기운이 목적지까지의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출발하고 커피와 가벼운 아침을 먹고, 세 시간쯤 걷고 나면 배가 고프고 피로가 몰려왔다. 그러면 카페에 들러 맥주를 마신다. 다시 걷다가 점심을 먹고 또 맥주, 그리고 저녁엔 당연히 와인이지. 와인 한 병을 싸면 2-3유로, 비싸 봐야 10유로가 안 되는 돈으로 사서 반씩 나눠먹었다. 파스타를 만들어 먹기도 하고, 식당에서 사 먹기도 했지만 거의 매일 맥주나 와인은 빠지지 않고 마셨다. 이러다가 주정뱅이 되는 거 아니야 라고는 했지만 함께 마신 맥주와 와인이 없었다면 우리의 카미노는 조금 더 심심했을 것이다.  



어느 날은 어떻게 해서 카미노를 오게 되었는지 얘기를 하게 되었다. 순진은 10년 전쯤 지금은 남편이 된 당시의 남자친구와 잠시 헤어지는 일이 있었고, 그때 마침 유럽 여행을 와서 한국인 민박집에 묵게 되었다.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여행 중이던 동생뻘의 남학생을 만났는데, 그가 산티아고 길을 걸을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온 순진에게 정말 산티아고를 간 그 남학생이 엽서를 보냈단다. 그 엽서를 받은 후로 ‘나도 한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해 왔다. 둘 사이에 뭔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나의 짓궂은 추궁에도 순진은 정말 그런 건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나는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다. 그렇게 믿는 편이 더 낭만적이니까, 뭐.


산티아고 길의 후반부에 이제 혼자이고 싶다는 생각도 더 이상 없는 채,  순진과의 동행이 더 익숙하고 즐거워질 무렵 매일 아침 생각나는 노래를 부르곤 했다. 자칭 띰쏭(Theme Song)인 셈이었는데, 그게 간혹 순진을 괴롭게 하곤 했다. 어느 날은 내 입에서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가 흘러나왔는데 문제는 그 노래를 끝까지 모른다는 거였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얼씨구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잊자 잊자 오늘만은, 미련을 버리자” 대략 이런 식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를 듣던 순진은 아무래도 노래가 이상하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걷는 내내 머리 속에서 그 노래가 떠나지 않는다면서 나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침에 노래를 하나 부르기 시작하면 그날은 하루 종일 그 노래만 머릿속에 맴돈다며. 나중에는 그 노래 가사를 물어보려 한국에 있는 아버지에게 국제전화를 해야겠다고 할 정도였는데, 결론을 말하면 내가 노래 두 개를 중간에 이어 붙인 것이 문제였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와 “차차차”를 붙인 것이다. 그 사실을 발견하고 그녀는 무척 기쁘고 뿌듯해했다. 나 역시 순진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아서 참 다행이었다. 그 후론 순진은 내가 아침에 길을 나서며 부르기 시작하는 노래를 더 엄격하게 관리(?)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빈대에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하게 물리고, 좌절도 했고, 결국 함께 산티아고에 들어갔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고 쓰인 커다란 조형물 앞에서 서로의 사진을 찍어 주었고 산티아고 대성당에 함께 들어가 미사에 참석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거기서 만난 또 다른 순례자 아저씨를 번갈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신발을 벗어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성당 주변에서 순례자들을 만날 때마다 함께 울었다. 누군가 왜 우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려웠겠지만 다행히 어느 누구도 그렇게 묻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하게 서로를 안고 함께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순간에는 적어도 우리는 완벽하게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무엇보다도 그녀와의 동행이 좋았던 것은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그녀의 타고난 품성 덕이었다.  무언가를 함께 결정해야 할 때가 되면 순진은 거의 언제나 “언니가 좋은 대로 해요.”라고 말했다. 어디서 쉴까, 뭘 먹을까, 알베르게는 어디로 갈까, 또 아침엔 몇 시에 출발을 할까. 많은 순간에 순진은 나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유일하게 순진이 자기주장을 강하게 편 때는 우리 모두 빈대로 고생하느라 호텔에서 욕조 목욕을 하고 옷을 소독하는 일이 간절했을 때 돈 때문에 주저하는 내게 “언니는 알베르게 숙박비만큼만 내요. 나머지는 내가 낼 테니까.”라며 호텔에 묵을 것을 설득했을 때뿐이었다. 

산티아고에서 바닷가 마을인 피니스테라, 그리고 묵시아까지 동행한 우리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것은 묵시아에서의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나서였다. 하루 차이로 나보다 먼저 산티아고로 돌아가 포르투갈에서 친언니를 만나기로 한 순진과 이제는 헤어지는 것이다. 이른 아침 출발하는 버스를 기다리며 ‘아, 이젠 정말 안녕이네. 하지만 다시 또 만날 거야’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따뜻한 포옹을 마지막으로 버스를 타고 떠난 순진은 친언니와 함께 여행을 하던 포르투갈에서 내내 카미노가 그립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나 역시 카미노를 생각하며 독일로 향했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여행을 떠났다.


2개월쯤 지나 우리는 서울에서 다시 만나 카미노를 그리워하며 맥주를 마셨다. 나는 다시 인도로 돌아왔고, 순진은 취직을 하고 일상을 시작했다. 그런 그녀에게 며칠 전 엽서를 띄웠다. 혹시 언젠가 그녀가 인도로 여행을 오게 된다면 내가 보낸 그 엽서가 기억될 것이다. 그런 것을 기억해 주는 순진은 참 좋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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