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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anii Jul 01. 2016

나의 산티아고記-10

순간들이 모여 기억이 되고, 걸음 하나하나가 모여 순례길이 완성되었다.

파리에서

동생이 살고 있는 영국에서 3주 가까이 시간을 보내고 산티아고 순례길의 출발점인 생 장 피 드 포르로 가기 위해 프랑스로 향하던 날,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으니 프랑스에 대해서 하나도 조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파리에서 우선 하룻밤을 보내야 했고, 생 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기차도 타야 했는데 내가 한 일은 당일 묵을 민박집과 파리-생 장 기차를 예약한 것뿐이었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불어를 배웠지만 대입 학력고사에서 20점 만점에 5점도 얻지 못하는 참으로 우스운 성적을 거뒀던 나는 재수를 하며 제2외국어를 중국어로 바꾸고 당당히 19점을 받는 쾌거를 이룰 정도로 불어를 싫어했다. 그런데 불어는 한마디도 못하고, 대중교통 시스템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겠고 도대체가 파리 지도 조차도 없었다. 하긴 나는 영국의 슈퍼마켓에서 유로를 내밀 정도로 유럽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 이유가 인도에 살아서라고 주장하고 싶기는 하지만 통하지 않는 변명이겠지.


아무튼 파리에 도착해 지하철을 타러 가니 자동 매표기는 도저히 모르겠고, 역무원이 표를 판매하는 창구는 줄이 어마어마하게 길었지만 참고 기다렸다가 물어보니 다른 곳을 알려준다. 그래도 모두들 친절하게 대해주어 마음이 조금 놓였다. 어렵게 지하철을 타고 민박집에 갔다. 찾을 수 있는 가장 싼 곳을 찾다 보니 30유로도 안 되는 곳을 찾아 예약을 했지만 파리 중심가에서는 조금 멀다. 나는 돈을 아끼고 몸이 고생하는 여행에 익숙한지라 지하철로 30분 정도 가는(서울에서는 한 시간도 넘게 타고 다니는데 뭘~) 건 아무것도 아니다. 게다가 파리는 서울에 비하면 정말 작다(고 한다.). 다만 작고 복잡한 지하철에서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자니 민폐인 것 같아 눈치가 보이긴 했다. 찾아간 민박집은 지하철 역에서도 10분 가까이 걸어가야 했지만, 조선족 출신인 주인 아주머니도 친절하시고, 아침과 저녁까지 제공해 주셔서 순례가 끝나고 난 후 이틀 동안 파리에 머물 때도 다시 찾아갔다.


파리에서 생장에 가기 전에 먼저 기차를 갈아타게 되는 바욘행 기차는 왜 일등석일까. 인도에서 밤마다 인터넷으로 검색한 결과 레일 유럽 raileurope 사이트로 예매를 했는데, 무슨 일인지 일등석이었다. '아니, 왜 때문에 이런 일이!' 후회가 막심했지만 기왕 예약한 거 프랑스 일등석은 어떻게 생겼나 보자 하는 심정으로 자리에 앉았는데 거 참 편하긴 하다. 그리고 그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이 여행기의 1편에 등장했던 발레리아다. 얼마 전까지 나를 만나러 다람살라에 오겠다더니, 집이 그리워졌다면서 브라질로 돌아간 발레리아. 


이 날 발레리아와 나는 바욘에 내려 생 장 행 차 시간을 기다리면서 짐을 줄이기 위한 소포 부치기에 도

전했다. 생 장에 도착해 아침에 우체국에 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해뜨기 전에 대부분 출발한다는 순례자들의 시간표에 비해 너무 늦어지게 될 것이 걱정돼서였다. 내 배낭은 산티아고 순례 이후의 여행과 한국행까지를 염두에 둔 각종 옷과 선물까지 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라면 하루도 제대로 걸을 수 없을 것이었다. 원래 생 장에서는 도착지인 스페인 산티아고 우체국에 소포를 부쳐주는 서비스가 있다고 알고 있었지만 바욘의 우체국은 정작 그런 정보가 전혀 없었다. 불어에 능통한 발레리아가 아무리 물어봐도 산티아고 우체국 주소를 우리가 스스로 알아오지 않는 이상 부쳐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고민하다가 마침 나는 그다음 방문지인 독일의 친구 집으로, 발레리아 역시 유럽에 있는 다른 지인의 집으로 소포를 부쳤다. 허겁지겁 우체국 바닥에 가방을 풀어서 소포로 부칠 짐을 고르느라 정작 나중에 확인해 보니 필요도 없는 가죽 지갑 같은 것이 그대로 남아 있어 한숨이 나기는 했지만.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걸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정말 깃털 하나도 버리고 싶을 만큼 무겁게 느껴진다. 그 지갑이 큰언니의 선물만 아니었어도 냅다 버렸을 텐데... 

출발지인 생 장 피 드 포르에서 받은 첫 세요(스탬프) 피레네를 넘으며 맞은 비에 젖어 약간 번져있다.

day 1. 생 장 피 드 포르 - 론세스바예스:26km

생 장에서 출발하는 여정이 가장 힘든 것은 첫날 피레네 산맥의 일부인 해발 1430미터 정상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생 장이 해발 200미터이니까 하루 만에 1230미터를 올라갔다가 950미터인 론세스바예스까지 가야 하는 것인데 이 피레네 산맥은 매년 조난 사망자가 발생할 정도로 쉽지 않은 코스다. 내가 이곳을 지나던 날은 출발 시간부터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거의 정상에서는 폭우가 되어 앞이 안 보일 정도였고, 온몸이 다 젖은 가운데서도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해 배가 고픈 나머지 올케가 싸준 비장의 식량, 김치라면을 생으로 씹으며 걸었다. 익숙지 않은 몸에 26킬로미터를 걷고 나서야 론세스바예스의 수도원에서 운영 중인 엄청나게 큰 규모의 알베르게에 묵을 수 있었다. 지친 몸이 맥주와 맛있는 식사 덕분에 회복되는 것 같았다. 순례자 식사를 내놓은 식당에서 함께 앉게 된 순례자들은 '정말 힘들었지만 앞으로는 이보다 더 쉬울 거야. 더 나쁠 수도 있었는데'라며 위로를 나누었다. 덕분에 우리는 모두 '해볼 만하겠는데' 하는 자신감이 넘치는 듯했다. 이날의 예상대로 길만 놓고 보면 이보다 더 힘든 길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 몸이 풀리지 않은 첫날 겪은 것 치고는 잘 해낸 것이다. 잠자리와 숙소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다른 곳에 비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정작 그때는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지붕이 있고 잠을 잘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다만 내가 묵게 된 방은 지하에 위치해 있었는데 반원형의 방들이 복도로 나란히 연결된 듯한 모습이었다. 이 방들에는 문이나 벽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하나의 방이나 다름없었다. 이 반원형 방에 벽을 따라 이층 침대들이 늘어서 있는데, 유독 한 침대는 옆 면이 아닌 머리 쪽만 벽에 붙은 채로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침대에 누우면 좌우 모두 벽도 없고, 낙하를 방지해줄 난간 같은 것도 없어서 이집트의 미라가 빙의된 듯 반듯한 자세로 잘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층 침대에 사다리가 없어서 재주껏 오르내려야 하는 통에 밤에 화장실에 가는 일이 곡예에 가까웠다. 조금만 더 나이를 먹었다면 그곳에서 자는 것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곳 침대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친 한국인 순례자가 있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비교적 무난한 나의 잠버릇에 감사했다. 

이 날을 기억할 만한 인상적인 일이 한 가지 더 있는데 친구의 조언으로 들고 간 접는 삼단 우산을 얌전히 침대 옆에 놓고 옴으로써 순례자의 청빈과 나눔의 정신을 실천했다는 것이다. 아니다. 그저 나는 쏟아지는 빗 속에서 우산을 들고 배낭을 멘 채 걷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아끼던 삼단 우산, 인도에선 다시 구할 수 없는 한국에서 산 가볍고 예쁜 삼단 우산은 그렇게 나의 여정 첫날 사라져갔다. 이렇게 시작된 물건 버리기는 여정 마지막까지 이어지는데 그래도 내 배낭은 13킬로 정도였다. 캐논 G11 카메라와 핸드폰, 충전기 게다가 전자책까지 챙겨간 나를 탓해야 할 일. 아아. 이 배낭을 메고 나는 무사히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


론세스바예스의 세요. 예쁘고 특이한 모양의 세요를 받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첫날이라 신기하기만 했던 노란 화살표. 이 화살표에 우리는 길들여졌지.
생 장에서 론세스바예스로 가는 길. 이 잘 포장된 예쁜 길이 얼마나 우리를 지치게 했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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