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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anii Jul 10. 2016

나의 산티아고記-12

day4. 팜플로나-푸엔테 라 레이나:24km

이 날의 여정은 알토 델 페르돈(Alto del Perdon)을 지나게 된다. '용서의 언덕'이라고 불리는 이 곳은 철판으로 만들어진 순례자들의 조형물로 유명한 곳이다. 말을 타고, 당나귀를 끌고 바람을 맞으며 걷는 순례자들의 모습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어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다룬 여행기나 가이드북에는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 곳의 높이는 770m. 완만하지만 길게 이어지는 오르막길이 다소 힘들다. 이 언덕에는 풍력 발전기가 등성이를 따라 설치되어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조지 웰스의 소설 '우주전쟁'에 나오는 화성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풍력 발전기를 바라보며 언덕에 오르자 기념사진을 찍는 순례자들이 보인다. 나도 그들을 기다렸다가 사진을 찍었다.  


스페인 친구들에게 이 언덕의 이름이 '용서의 언덕'이라는 말을 듣고 걷는 내내 왜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를 생각했다. 이 언덕의 이름은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일까, 혹은 용서하기 위한 것일까. 내게는 용서할 일과 용서받을 일 중 어느 쪽이 더 많을까. 20대 때의 나는 오래도록 세상에 화가 나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함, 강요된 부조리, 대답하지 않는 사회, 그리고 그 사회와의 불화. 이런 것들이 내 마음속에서 터질 것처럼 자라고 있었다. 그 시간들을 힘겹게 보내고 나는 내 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법을 배웠고 이제 조금은 평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순례길의 초반에 만난 이 용서라는 단어는 내게 큰 질문이 되었다. 이제는 세상을 용서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건방진 질문을 던지다가 다시 나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를 묻고 있었다. 나는 용서를 받기 위해 산티아고로 가고 있는 것인가.


언덕에 올라 사진을 찍으며 느낀 감격도 잠시, 언덕에서 내려가는 길은 험한 편이었다. 수많은 순례자가 지나는 탓인지 모르겠지만 나무나 풀은 거의 말라 죽고 자갈과 붉은 흙만 드러나 있었다. 산티아고 길에서 간간이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훼손되는 자연뿐 아니라, 순례자들을 맞이하느라 힘겨운 순례길의 마을들을 보면서 미안하면서도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 


푸엔테 라 레이나의 알베르게는 숙박비도 5유로에 불과한데 시설도 깨끗하고, 건물 뒤편에 넓은 정원도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땀에 젖은 빨래를 손으로 빨아 마당에 널고 나니 피로가 몰려왔다. 걷기 시작한 지 4일째, 아직까지 나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에구구구'하며 신음소리가 나오는 상태였다. 일주일이면 적응이 된다고, 빠른 사람들은 3,4일이면 괜찮아진다고 하는데 과연 일주일 만에 적응이 될지 의문을 품고 잠자리에 든다. 산티아고에 관한 책들을 보면 다른 순례자들의 코 고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거나 낯선 잠자리에 뒤척거렸다는 얘기를 읽을 수 있는데, 4일째 나는 머리만 대면 기절하는 수준이었다. 다행히 깊은 생각이고 고민이고 할 여유가 없다. 오로지 걷고, 먹고, 자는 일뿐.

신발장에 가득한 순례자들의 등산화. 물론 냄새도 가득.

day5. 푸엔테 라 레이나-에스테야:22km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는 알베르게 중에는 밤 시간에는 알베르게를 관리하는 호스피탈레로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푸엔테 라 레이나의 알베르게도 그런 곳이었는데, 대게 순례자들은 이른 새벽 조용히 짐을 싸서 각자 준비한 간단한 식사를 하고 떠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날은 문제가 된 것이, 마당으로 통하는 문이 잠긴 상태였기 때문이다. 전날 오후 널어놓은 빨래를 미처 걷지 못했는데 문을 열어줄 호스피탈레로도 없는 채였다. 순례자들은 하나 둘 떠나는데 나를 비롯한 몇몇 순례자는 빨래를 걷지 못해 잠긴 문 앞에서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이미 수비리에서 티셔츠를 하나 놓고 온 터라 빨래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결국 30분 남짓 기다린 끝에 빨래를 챙겨서 남보다 늦게 출발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에스테야. 별을 뜻하는 라틴어 'stella'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는데, 이름만큼 작고 아기자기한 마을이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감탄했던 것 중 하나는 스페인이 참 넓고 아름다운 땅이라는 것이었다. 피레네 산맥을 벗어나면서부터는 대체로 평평한 대지에 넓은 밭과 언덕에 자리 잡은 마을, 그리고 마을의 중심에 위치한 성당이 전형적인 풍경이었는데, 멀리서부터 조금씩 다가가면서 보이는 마을과 주변 풍경이 언제 보아도 질리지 않을 만큼 예뻤다. 에스테야도 그런 예쁜 마을이었다. 그리고 이 날, 100km를 돌파했다. 지금까지의 누적 거리는 115.5km. 우아~ 태어나서 가장 긴 거리를 걸었다. 


아기자기하게 장식된 에스테야의 가정집. 조롱박도 순례자의 상징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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