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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anii Jul 21. 2016

나의 산티아고記-13

day6. 에스떼야-로스 아르코스:22km

에스떼야에서 로스 아르코스로 가는 여섯 번째 날은 한 가지 설레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만나게 되는 수도원에서 포도주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수도원에서 순례자를 위해 설치한 수도꼭지에서 포도주가 나온다는 소문을 다른 여행자들에게 듣고 알게 되었는데, 이른 새벽 출발한 지 한 시간 남짓만에 바로 그 장소에 도착했다. 듣던 대로 수도원 바깥 벽에는 수도꼭지 두 개가 설치되어 있고, 주변에는 향긋한 포도주 냄새가 떠돌고 있었다. 잔뜩 들떠 가까이 다가가 보니 먼저 온 순례자들이 수도꼭지를 바라만 보고 있다. 기대와 달리 포도주는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순례자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포도주가 동이 났다는 말을 듣고 입맛을 다시며 길을 떠났다.


사실 스페인에서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고(사실 매일 마셨다), 포도주가 비싼 것도 아니고(1-2유로짜리도 엄청 많았다), 심지어 99퍼센트는 맛있었다(딱 한번 상한 와인을 산 것을 빼고는 다 성공). 그러니 수도원의 공짜 포도주 한 모금이 아쉬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뭔가 신기한 체험을 하고 싶었던 것뿐. 지난 5년 동안 인도에 살면서 맛있는 맛있는 포도주를 마실 기회도 흔치 않고, 또 비싸고 좋은 포도주가 없지 않지만 그런 포도주를 사 마실 처지도 아니었다. 그런데 싸고 맛있고 다양한 포도주를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스페인은 정말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날마다 낮에는 맥주, 저녁에는 와인을 마셨는데 이 정도면 순례가 아니라 '술'례라고 해야 할지도. 그래도 순례자의 본분을 아주 잊지는 않았기 때문에 취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수도원에서 포도주 마시기는 실패했지만 나중에 만난 캐나다 아저씨 빌은 생수통에 포도주를 받아와서 홀짝홀짝 마시며 자랑을 하기도 했다. 아쉽지만 나와는 인연이 아니려니 생각할 수밖에.


이날의 여정은 비교적 평탄했다. 오르막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게 가파르지 않아서 힘들지 않았다. 완만한 벌판을 지나는데 길가에 과일을 내놓고 파는 스페인 사람들을 만났다. 카미노에서는 종종 이렇게 마실거리와 먹을거리를 내놓고 팔거나, 혹은 기부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있다. 순례자들이 선호하는 커피나 과일을 팔거나 장식품을 내놓고 파는 사람도 있는데 이날 만난 사람들은 아코디언 연주자까지 있었다. 흥겨운 마음에 기꺼이 과일을 사 먹었다. 

day7. 로스 아르코스-비아나:18.5km

드디어 카미노를 걷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되는 날. 미쉐린 지도책에서 권하는 목적지는 대도시인 로그로뇨다. 하지만 이곳까지 가려면 28km를 걸어야 한다. 일주일이 되었지만 아직도 내 발과 다리는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내게 28km라니 그건 너무 멀다. 그래서 대신 로그로뇨 전에 있는 마을 비아나를 목적지로 정했다. 20km 이상 갈 생각은 있었지만 아쉽게도 비아나와 로그로뇨는 9.5km나 떨어져 있지만 그 사이에는 다른 마을이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산티아고에 일찍 도착해야 할 이유도 없는 나는 당연히 시원하게 목적지를 비아나로 정하고 다른 날보다 느긋한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완만한 오르막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앞뒤로 순례자들이 줄 서서 걷고 있었다. 그날따라 센 바람에 몸을 숙이고 걷는데, 어떤 순례자가 큰 소리로 "we are all zombies!"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이 많은 사람들이 한 줄로 서서, 한 방향으로 묵묵히 걷는 모습을 보니 어째 좀비들 같기도 하다. 단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걷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이렇게 걷고 있는 것일까. 공감의 웃음을 터뜨리며 언덕을 오른다. 

나의 몸은 걷는 일에는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단 일주일 만에 걷다가 마시는 맥주에는 재빠르게 익숙해져 있었다. 얌체 같으니라고. 아직도 무릎이, 발가락이, 허리가 아픈데, 내 몸은 그에 대한 대가라도 요구하는 것처럼 걷기 시작한 지 2-3시간만 되면 맥주를 간절히 원했다. 


그즈음 일주일이면 적응이 될 거라던 여행기 속의 예상은 단지 걷기의 고통에 관한 말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있었다. 해뜨기도 전에 일어나 어둠 속에서 손전등을 입에 물고 짐을 싸고, 카페 콘 레체(우유를 넣은 커피)로 이른 아침의 졸음을 쫓는 일. 땀에 절은 배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할 때면 빼놓지 않고 맥주 한잔으로 목을 축이고,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서둘러 티셔츠를 빨아서 말리는 일(달랑 두 장이기 때문에 오늘 빨지 않으면 내일은 입을 것이 없다), 그리고 1유로짜리 와인을 곁들여 저녁을 먹는 일. 이렇게 이루어지는 하나의 일정표가 완성되어가는 것이고, 그것에 몸도, 마음도 적응해 간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이미 이런 생활에 적응해가고 있는 내가 길가에 작은 트럭을 세우고 맥주를 팔던 이 곳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이날은 마을도 상점도 거의 없는 길이었던지라 트럭에서 파는 맥주가 2유로, 다른 날보다 비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맥주 에스떼야 담은 얼마나 맛있던지.

그렇게 한껏 기분이 좋아져서 도착한 비아나는 작은 마을 축제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축제의 주제가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바로 드레스 코드는 빨강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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