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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anii Jul 02. 2016

나의 산티아고記-11

day 2. 론세스바예스 - 수비리 : 21.5km

론세스바예스에서의 첫밤을 보내고 해가 뜨기도 전 출발을 했다. 어둑한 숲길을 혼자 걷자니 무서운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앞뒤에서 들려오는 다른 순례자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안심할 수 있었다. 이날 걸은 거리는 21.5km. 전날에 비하면 훨씬 짧은 거리다. 생 장 피 드 포르의 산티아고 순례협회에 가면 순례자들에게 표준 여정을 안내하는 유인물을 나눠준다. 거기에는 대략 25km 내외로 여정을 잡아 매일 묵을 수 있는 알베르게와 편의시설에 대한 안내가 나와 있는데, 아쉽게도 나는 이 유인물을 받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순례협회를 직접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기념품점에서 등산 스틱을 사면서 미쉐린(타이어 회사 미쉐린 맞다.)에서 나온 산티아고 지도책을 구입해서 참고하며 걸었다. 이 지도책도 역시 거의 똑같은 길을 안내하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 몇 km씩 다른 위치를 목적지로 추천하기도 한다. 둘째 날 내가 도착한 수비리도 이 지도책의 이틀째 목적지인 라라소아냐보다는 5km 못 미친 곳이다. 첫날의 피로가 아직 남아 있기도 했고, 수비리가 라라소아냐에 비해 약국과 상점이 있는 큰 마을로 표기되어 있어 그곳에 묵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스페인 아저씨 빈첸토를 만났다.(2편의 주인공인 쫄쫄이맨 아저씨)

수비리까지의 길은 그다지 기억에 남는 일이 없다. 숲 사진과 해가 뜨는 사진 몇 장, 셀카가 몇 장 남아 있을 뿐이다. 함께 출발했던 발레리아와는 이미 헤어졌고, 아직 아는 얼굴도 거의 없었다. 거의 완벽하게 혼자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쓸쓸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날 셀카 속의 내 표정은 여전히 설레 보인다.


여기서 처음으로 스페인어로 길을 물었다. "페르돈, 세뇨라. 돈데 에스타 알베르게 무니시팔?" 실례합니다. 부인. 공립 알베르게가 어디 있나요?라고 물은 것인데 사실 알베르게 앞에 관사가 필요한데 까먹고 대충 패스. 아이를 데리고 가던 여자분이 길을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찾아간 알베르게에서 빈첸토 아저씨를 만나 밥도, 술도 얻어먹는 행운도 있었고, 딱 한벌 다람살라의 재활용 가게에서 힘들게 발견한 기능성 티셔츠를 놓고 오는 불행도 경험했다. 아아. 앞으로 면티셔츠만 입고 걸어야 하다니... 


그리고 노미를 만났다. 노미는 아버지가 일본인, 어머니가 캐나다인이고 캐나다에 살고 있는 참 예쁜 친구였다. 내 손목의 염주를 보고 불교도냐며 말을 걸어왔다. 우리는 가톨릭 성지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에서 티베트 승려인 소걀 린포체의 "The Tibetan book of living and dying"이 놀라운 책이라며 한참 동안 불교와 요가를 소재로 수다를 떨었다. 뭐 그랬다한들 야고보 성인이 화를 내실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화를 내서야 성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노미와는 그 후로도 2-3일에 한 번 정도로 마주쳤고, 산티아고에 도착한 날 다른 친구들과 껴안고 울기도 했다. 산티아고 순례를 마치고 인도에 와서 요가를 배우고 캐나다로 돌아간 노미. 카미노의 다른 인연들처럼 언제가 될지 기약은 없지만 꼭 다시 만나고 싶은 친구다. 

수비리의 공립 알베르게

day 3. 수비리 - 팜플로나 : 22km

수비리에서 역시 해뜨기 전 출발. 알베르게에 있던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고, 기능성 티셔츠는 까맣게 잊은 채 당당히 길을 나섰다. 날씨는 흐렸고, 아직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보다는 노란 화살표를 찾고 아픈 다리를 신경 쓰느라 바빴던 것 같다. 이날 도착하는 도시는 팜플로나. 처음 만나는 도시다. 나는 사실 산티아고 길에서 만나는 도시나 마을의 알베르게 혹은 성당, 관광지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시피 했다. 전자책에 넣어간 두 권의 산티아고 여행기는 그런 내용은 별로 담고 있지 않았고, 출발 한두 달 전부터 가입했던 인터넷 카페는 너무 많은 정보들이 가득해서 오히려 핵심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한국처럼 인터넷이 원활하지도 않다 보니 꼭 필요한 정보만 어찌어찌 수집했을 뿐, 어디 가면 알베르게가 어디가 좋다던가, 식당은 어디가 맛있다던가 하는 구체적인 정보는 전무했다. 다행히 길에서 만난 순례자들을 따라가거나 귀동냥을 하다 보면 그럭저럭 남들처럼 가고, 묵을 곳을 찾을 수 있게 된다. 팜플로나에서 묵었던 예수와 마리아 알베르게도 그렇게 누군가를 따라서 찾아갔다. 

예수와 마리아 알베르게 Albergue de Jesus y Maria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데다 아직까지 뭔가를 보겠다는 의지가 충만해 있던 터라 큰 맘먹고 팜플로나 대성당을 구경하러 나섰다. 순례자 요금으로 3유로를 내고 이후로는 질리게 보게 될 스테인드 글라스와 성모상과 궁륭형 천장을 감탄하며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발견한 지하의 작은 방에 아기 예수를 무릎에 앉힌 성모자상이 있었다. 이 성모자상을 바라보고 앉을 수 있게 놓인 의자 한 개. 그리고 들려오는 찬송가. 그 의자에 한참을 앉아 그 상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겪은 슬픔에 비하면 우리의, 저의 슬픔은 아무것도 아니겠지요. 아니 그 슬픔의 힘으로 저희를 위로하시겠지요 라고 속삭였다.

팜플로나 대성당의 성모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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