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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anii Aug 21. 2016

나의 산티아고記-16

day11. 빌로리아 데 리오하-비야프란카 몬테스 데 오카:20.5km

11일째, 몸도 마음도 많이 가벼워졌지만 아직 무릎이 아팠다. 웬일인지 이 날은 찍은 사진도 거의 없고, 메모도 없다. 단 3장 남짓의 사진 중 하나는 길가의 기둥에 티베트 국기 스티커가 붙어 있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찍은 것이다. 이 스티커는 거의 산티아고에 닿을 때까지 종종 발견할 수 있었는데, 누가, 얼마나 먼저 이 길을 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이 단체가 티베트를 지원하기 위한 스페인 사람들이 만든 단체로 산티아고 길을 홍보활동의 하나로 뛰었다는 것만 홈페이지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산티아고를 걷다 보면 무수한 글귀와 신앙이나 신념의 흔적, 그리고 메시지를 만나게 되지만, 5년째 인도의 티베트 난민 마을에서 살며, 티베트 NGO에서 일하고 있는 나로서는 반갑기 그지없는 스티커였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스티커를 보고, 난민으로 살고 있는 티베트 사람들의 현실을 기억해 주기를 바랐다.


재미있는 일은 숙소로 묵었던 산 안톤 아바드라는 호텔에서 있었다. 아, 호텔이라니. 고작 열흘 남짓 걸은 주제에 순례자의 본분을 망각하고 육신의 안락에 굴복한 것인가. 그럴 리가. 육신의 안락은 언제나 환영(?)하는 나지만 순례자의 본분 때문이 아니라 주머니 사정 때문에 호텔에 묵을 생각은 감히 할 수 없었다. 물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보이는 순례자들도 항상 10유로가 안 되는 알베르게에 묵으며 자신의 본분이랄까, 역할이랄까에 충실한 것이 카미노의 관행이긴 하지만.


이날 묵은 호텔은 비야프란카 몬테스 데 오카에 있는 숙소 두 개 중 하나였다. 이 마을은 어쩐지 마을 가운데로 갑자기 큰 도로가 뚫려 둘로 나뉜 듯한 인상이 드는 곳이 었는데, 나머지 하나의 알베르게는 그 도로변에 있었다. 천천히 걷는 일에 익숙해진 내게 빠른 속도로 차가 지나는 그 길이 왠지 맘에 들지 않아 다른 하나의 숙소를 찾아간 것이다. 그리고 그곳은 호텔과 알베르게를 동시에 운영하는 곳이었다. 프런트에 다가가 알베르게에 묵고 싶다고 말했더니 친절하게, 호텔 건물 뒤편에 있는 순례자용 알베르게로 안내를 해주었다. 덕분에 크레덴시알에는 호텔 산 안톤 아바드라고 찍힌 세요를 받게 되었고. 달리 식당도 없는 마을인 터라 호텔 식당에서 파는 순례자 메뉴를 먹기로 결정했는데, 알베르게는 5유로, 순례자 메뉴는 12유로였다. 조금 비싸긴 하지만 이런 때는 어쩔 수 없다.


혼자 식당에 가니 애피타이저부터 와인 한 병에 후식까지 나오는 식사를 혼자 즐기게 됐다. 와인은 대개 테이블에 한 병씩을 주는데 나는 한 병을 독차지하게 된 상황. 나름 천천히 와인을 즐기며, 식사를 하던 내게 건너편의 서양 여성 두 명이 손짓을 하더니 자기네와 함께 먹자고 한다. 와인을 마신 탓이었는지 평소 같으면 거절을 할지도 모르지만 선한 인상의 그녀들과 기꺼이 합석을 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오랜 친구사이로 70대에 접어든 미국인 베티와 낸시였다. 카미노를 왜 왔는지, 가족들은 어떤 반응이었는지, 걷느라 아픈 데는 없는지 이런저런 얘기로 수다를 떨었다. 무릎이 아프다는 내게 진통제인 이부프로펜을 먹으라고 권하더니, 와인을 많이 마셨는데 괜찮겠냐고 묻자, "괜찮아, 괜찮아. 먹어, 먹어."라고 과감한 조언을 한 이는 간호사 출신의 낸시였다. 모처럼 기분 좋게 취기가 올라 식사를 마칠 무렵 낸시가 저녁을 자기가 사겠다고 하는 바람에 사양을 하느라 당황하긴 했지만 귀엽고 수다스러운 미국 할매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도 그녀들처럼 70이 되어 친구와 함께 카미노를 걸을 수 있을지 궁금하고 부러운 밤이었다.

day 12. 비야프란카 몬테스 데 오카-카르데뉴엘라 리오피코:24.5km

이날은 오전 중에 몬테스 데 오카(그러니까 오카산이겠지. 음. 나 이제 스페인어를 제법?)를 넘어야 한다. 문제는 다음 마을에 해당하는 산 후안 데 오르테가까지 12km의 산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1162m의 봉우리를 넘으면 완만한 내리막길의 끝에 산 후안 데 오르테가가 있다. 알베르게도, 상점도, 민가도 없는 12km의 산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걸어보니 일반적인 산길에 비해 길이 넓기도 하고 순례자들이 꾸며놓은 이런저런 표지 덕분에 지루하진 않았다. 

사실 카미노를 걸어보면 단 1분이라도 시간을 내어 앞으로 나아가는 일 이외의 다른 행동을 하기가 쉽지 않다. 매일매일 걸어야 할 거리는 숙제처럼 다가오고, 몸은 천근만근, 배낭은 그보다 더 무겁게 느껴진다. 누가 얼마를 걸으라고 숙제를 내 준 것도 아닌데, 나는 일정도 넉넉한 편이었는데도 오로지 부지런히 걷는 일에만 집중하게 된다. 카미노에 가기 전 읽었던 책에서 고작 200m를 돌아가게 된 사실에 낙담하는 이야기를 읽고 '아니, 엄살이 심한 것 아니야.'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그랬다. 200m는커녕 2m도 허비하고 싶지 않아지는 것이 순례자의 마음인데, 그런 길 위에 자갈을 모아 멋진 글씨를 남기거나, 꽃을 장식하다니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노력을 해 준 사람들 덕분에 덜 지루하긴 했지만, 이 길의 문제는 지루함이 아니었다. 제법 큰 숲을 가로질러 민가가 없는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혼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워낙 겁이 많은 나는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몇 달 전에 있었다는 살인 사건도 떠오르고, 인터넷 카페에서 읽은 권총 강도 이야기도 떠올랐다. '여기서 강도가 나타나면 어떡하지. 저항하지 말고 다 줘야지. 그럼.' 이런 생각을 하며 걷다가 저 멀리 앞에서 움직이는 배낭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부지런히 잰걸음으로 쫓아가는 나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그 배낭이 사라진 후엔 허탈함만 남긴 했지만. 

이 날 묵은 알베르게는 음식이나 친절함이라는 점에서는 별로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알베르게가 좋고, 어디에서 좋은 인연을 만날지는 아무리 가이드북을 열심히 읽어도 예측하기 어렵다. 또 남의 경험의 흔적을 좇아 안전함을 기대하고 그 길을 걷고 싶지도 않았다. 삶은 그저 내 몸으로 부딪힘으로써만 내 것이 되는 것이니까. 다만, 채식을 한다는 내게 걱정 말라며, 채식 메뉴가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던 알베르게의 아저씨가 내놓은 것은 달걀 2개 분량의 스크램블 에그와 후렌치 프라이였다는 점을 기록해 둔다. 9유로나 받았는데 말이다. 다른 순례자들의 메뉴는 치킨이었다. 그리고 저녁 식사 후 마당에서 일본인 아가씨 두 명을 만났는데, 인사를 하고 지나치려다가 "둘이 혹시 자매냐?" 고 물었는데 "쌍둥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런. 자세히 보니 똑같이 생겼다. 오늘은 뭐가 잘 안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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