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banii Sep 11. 2016

나의 산티아고記-17

day13. 까르데뉴엘라 리오피코-따르다호스:25.4km

전날 밤 채식 메뉴로 달걀부침을 주었던 알베르게에 이른 아침 출발하는 시간에는 순례자들밖에 없었다. 아침 식사를 주문한 순례자들을 위한 커피와 빵 외에는 따뜻한 물도 찾을 수가 없어서 전날 산 복숭아에 갖고 있던 티백으로 차를 마시려던 계획은 포기하고 복숭아만 우물거리며 길을 나섰다. 알베르게에서 나오자마자 누군가의 책에서 보았던 벽화를 발견했는데, 순례자라면 백이면 백 공감이 갈 것이다. 배낭 하나 메고 떠나면 참으로 홀가분하고, 바람처럼 가벼울 거라 생각하지만, 실상은 살기 위해 이고 지고 다니는 바로 그 배낭, 그리고 이놈의 팔다리가 짐이 되는 순간이 온다. 머리 속은 온통 편안하게 쉬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는데, 그러면서도 결국은 다시 새벽에 일어나, 가방을 챙기고, 신발끈을 매고, 길을 떠난다. 그리고 다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하는 자신의 모습을 꿈꾸면서. 그런데 나라면 안락의자가 아니라 욕조에 몸을 담그는 것을 꿈꿨을 텐데 싶다. 

오늘은 또 다른 대도시 부르고스를 지나간다. 그래서 부르고스 대성당을 지나치지 않고 구경을 했는데, 다른 것 보다도 건물의 규모와 화려한 내부 장식이 눈길을 끌었다. 크고 화려한 것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으므로 감동한 정도는 아니고, 여기서 기억할 점은 부르고스가 생장에서 312km 지점이라는 것이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은 천리행군이라나 하는 걸 한다고 들었는데, 나로서는 살면서 단일한 여정으로 가장 많이 걷는 기록을 매일 경신하고 있다. 출발할 때만 해도 꽤 더웠는데, 이날 사진 속의 나는 어느새 영국에서 산 바람막이 점퍼를 걸치고 있다. 얼굴은 더 까매졌고, 매일 빨아 입는 셔츠와 바지도 후줄근해졌지만 이젠 정말 순례자가 된 것 같다. 꼬질꼬질함에 있어서는 확실히.


day14. 따르다호스-까스뜨로헤리스:30.5km

이 날 드디어 미쉐린을 따라잡았다. 아니, 미쉐린 가이드북의 일정표를. 이 일정표에 따르면 오늘 20.5km를 걷도록 되어 있는데, 그동안 10km 남짓씩 늦게 걸었던 내겐 목적지인 까스뜨로헤리스까지 30km 정도가 된다. 꼭 그곳까지 가리라 맘먹은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 10km 이내에 다른 알베르게가 없는 데다가, 길도 평평한 편이라 내친김에 걸은 것이다. 물론 이제는 몸이 익숙해져서 평지의 30km 정도는 너끈히 걸을 수 있어서이기도 하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생장에서부터 보았던 A양(실명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아래에 나온다)이 마당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알베르게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호스피탈레로의 자원봉사 활동으로만 운영되는 알베르게의 경우 종일 열려있지 않는 일이 종종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그 경험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른 순례자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할애해서 봉사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이 열릴 때까지 A양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문이 열려 침대를 배정받고 샤워와 빨래를 마쳤다. 개운한 기분으로 A양과 함께 먹을거리를 찾아 큰길로 나오니 동네 아저씨들이 가득한 바가 있다. 피자에 와인을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다리가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또 어디도 아프더라며 푸념을 했다. 산티아고 길에서 아프고 힘들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발에 물집을 덕지덕지 달고도 자랑스러운 듯 보이고, 무릎 보호대와 지팡이에 의지해 다리를 질질 끌며 나타나는 순례자에게 격려와 박수를 보내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듣기에 따라서 무용담처럼 여기저기 아픈 곳을 이야기하다가 문득 A양에게 "넌 아픈 데 없지?"라고 물었다. A양은 같은 날 출발한 한국인들 사이에서 빠르게 잘 걷는 것으로 유명했다. 등산화도 아닌 운동화를 신고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걷는 그녀를 보고 매번 감탄했던지라 아마도 다리도, 어깨도 괜찮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부러워했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걷느라 아픈 건 없는데요, 첫날부터 치질 증상이 생겨서 거기가 엄청 아팠거든요. 근데 다들 저보고 잘 걷는다고, 안 아픈 모양이라고 하는데 말도 못 하고..." 누구에게나 아픔은 있다. 그렇게 나는 또 위로를 받으며, 그런 식으로 위로받는 나 자신을 조금 부끄러워하며 얼른 와인을 마셨다.

이전 16화 나의 산티아고記-1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