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은 과연 초등학교 입학 전에 떼야할까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이 다가오면서 시작된 고민.
한글 떼기. 엄마라면 겪는 이 고민에서 나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루크는 오티즘(고기능 자폐 스펙트럼, 아스퍼거증후군)으로 당시에는 아직 문장 구사도 능숙하지 않았다. 그런 아이에게 한글 공부라니. 그렇지만 언제까지 미룰 수 있는 부분도 아니었다. 나름대로 흥미를 유도하고자 동화책을 살짝 들이밀며 읽어주기도 하고, 낱말 그림 카드를 보여주면서 따라 해 보자 했지만 관심은 1도 없었다. 이제 겨울이 지나 봄이 되면 초등학생이 되는데. 아이는 전혀 할 생각이 없으니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속이 타들어 간다.
아이가 들어갈 초등학교 선배맘들의 피셜에 의하면
‘이 동네가 그렇게 학습열기가 높은 편은 아니다. 엄마, 아빠들도 공부보다는 인성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아이들도 예의 바르고 순한 편이다. 초등학교 분위기도 마찬가지. 면학 분위기도 상당히 부드럽고 유연한 편이어서 전국에서 선생님들이 서로 오고 싶어 하는 학교로 유명하다. 그리고 막상 학교 가면 한글보다는 생활 자조, 규칙적인 습관, 공동 질서를 따르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 그래. 아직 일상 자조도 어려운 아이에게 한글은 무슨. 학교에서 혼자 할 수 있도록 자조 부분에 더 신경을 쓰자.’라고 생각하며 생활 자조 훈련에 더욱 집중했다. 가방 챙기기, 필통과 필기도구 정리, 화장실 대소변 스스로 처리하기, 물병 뚜껑 열고 닫기, 의자에 오래 앉아 있기, 친구에게 양보하기, 다른 사람 몸과 물건에 손대지 않기 등 학교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관계에 익숙해지는 것이 우선이었다.
앞선 몇 차례의 경험으로 나의 압박과 서두름은 절대로 좋은 과정,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다. 그러기에 더욱 신중할 수밖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그래. 아이가 가서 필요성을 느끼면 스스로 하려 하겠지.‘ 라 여기며 과감히 한글 떼기를 내려놓았다. 자신의 이름 석자는 쓸 수 있게 하고. 그렇게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입학 후, 한 달의 적응 시기가 지나고 다가온 학교 상담일. 교실에서 뵌 루크의 담임선생님은 온화하고 따듯한 미소가 아름다운 분이었다. 아직 한글과 학습이 많이 부족한 아이라 죄송하다 앞으로 더 신경을 쓰겠다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 저 기다리는 거 정말 잘해요. 그러니까 루크에게 너무 푸시하지 마시고 아이의 속도대로 기다려주세요. 그리고 1학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하는 자조와 규칙, 질서 준수 태도를 배우는 거예요. 루크, 학교에서 잘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긴장이 와르르 풀어지며 하염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던 나에게 다가와 선생님은 포근한 마음의 위로를 건넸다.
언제부터였을까.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한글을 떼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 되었음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맘카페와 엄마들의 모임에서 늘 끊이지 않는 이슈이다.
“아이 한글은 어떻게 하세요?” ”입학하기 전에 한글 모두 떼고 가야 하나요?” 한글을 떼면 학교 학습에서 뒤처지지 않을 수 있기에 미리 하고 가야 한다. 아니다. 학교 학습진도에 따라 배우면서 교육을 받아도 충분하다. 의견이 늘 분분하게 나누어진다.
분명 초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를 보면 ㄱ부터 시작해서 한글을 익힐 수 있도록 되어 있지만, 일부 학교에서는 아이가 한글 떼기를 하고 오기를 요구하는 선생님들도 있다. 반 아이들의 대부분이 한글을 익혔고, 한글이 늦은 아이들로 인해 학습의 진도를 느리게 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 오죽하면 갓 돌이 지난 아이들부터 시작하는 한글 교재와 방문 선생님이 있을까. 부모의 불안감과 자녀를 향한 학습욕망이 어린아이에게도 투영되고 있는 모습에 씁쓸하지만, 이것이 경쟁 사회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다.
루크는 초등학교를 들어가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1 학년 말이 되면서는 까막눈을 벗어나 더듬더듬 글씨를 읽었다. 여전히 문장을 만들고 쓰며 구사함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러던 중,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을 앞둔 겨울이 되자 코로나를 맞이했다. 이후 거의 2년 동안 모든 학령기 아이들은 전에 없던 공교육 공백 기간을 보냈다. 학교가 아닌 가정에서.
그렇지만 그 공백 기간이 오히려 아이에게는 한글 공부의 꽃을 피우게 된 날들이었다. 1학년 때 학교에서 배웠던 기본적인 한글 교육을 바탕으로 스스로 글씨의 개념을 이해, 조합하는 재미에 빠졌다. 집에서 좋아하는 자연 도감과 책을 읽으면서 글자를 깊이 탐구하였고, 스스로 한글을 떼기 시작했다. 너무 읽어 문자중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책에 파고들었다. 그전에는 아무리 단어카드를 보여주거나 책을 들이밀며 옆에서 읽어주어도, 카드와 책을 낚아채어 도로 있던 자리에 꽂아두는 아이였는데. 몇 시간이고 앉아 책을 읽고 즐기는 모습에 나의 내려놓음과 기다림이 결국 옳았음을 확신했다.
오티즘 아이들은 시각 추구를 하며 집중을 하는 습관이 있는데, 루크는 글자로 온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아이들은 글자를 보고 또 보며 몰입을 하는데, 책에는 글자들이 한가득이니 좋아할 수밖에 없다. 한글에 눈이 떠지고 단어의 궁금증이 커지면서 끊임없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국어사전으로 단어를 찾아주는 법을 알려주니 스스로 찾아보고 뜻을 이해한다. 자연스레 문장 구사도 능숙해지고 제법 어려운 단어를 활용한 대화도 가능해졌다. 더불어 자신의 생각을 담은 독서록과 글쓰기 노트를 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아이들에게는 각자의 속도와 방향이 있다. 루크를 통해서 배운 것은 엄마가 옳다고 여기는 속도, 방향으로 애를 쓰고 이끌어 가려고 해도, 최종적으로는 아이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학습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교재, 방법이다 추천한다 해도, 내 아이에게 똑같이 적용되지는 않는다. 아이 만의 방법과 성향을 파악해서 스스로 주도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게 함이 요즘 강조하는 자기 주도 학습의 방향성이자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길이 아닐까.
한글 떼기도 아이가 필요하다 느끼지 않는다면 잠시 기다려 주는 것은 어떤가. 스스로 원하는 시기는 반드시 온다. 아이가 좀 느리더라도. 괜찮다. 뭐 어때.
한글은 평생 쓰고 배우는 건데
자녀 교육의 핵심은
지식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자존감을 높이는 데 있다
레프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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