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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벳 Dec 01. 2023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작은 행복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토요일 저녁, 일정이 끝나고 서울역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중. 각각 다른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버스를 기다린다. 어스름이 지는 저녁하늘과 함께. 그런데 전광판에서 15분 정도 남았다던 버스의 시간이 점점 늘어난다. 지도 어플을 켜보니 버스 정거장을 향해 다가오는 버스가 찰나의 순간 노선도에서 사라진다. 버스가 회차를 하나 아니면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하며 기다리는데. 전광판의 숫자는 줄어들다가 다시 늘어나기를 반복한다. 뭔가 느낌이 싸하다.


그 순간 멀리에서 북소리와 함성소리 들려온다.

아뿔싸. 시위가 있다. 그것도 토요일 저녁의 시위.


갑자기 마음이 바빠진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집에 돌아가기도 어려울 듯. 길 찾기 어플을 켜고 근처에 다른 버스 정류장이 있는지 확인해 보니, 걸어서 10분 거리 숭례문 근처에 정류장이 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상황을 종종 맞이한다. 이를 받아들이고 대응하는 태도는 각자 다르다. 즉흥적으로 다른 방안을 떠올려 빠르게 전환, 행동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당혹감이 싫어 미리 플랜 B를 세워두거나 원래 본인의 계획 그대로 진행하는 사람도 있다. MBTI로 말하면 P(인식형)과 J(계획형)으로 볼 수 있을 듯.


그중에서 난 지극한 J형으로 어디를 가게 되면 전날 미리 장소와 가는 길을 확인하고, 차를 가져갈 경우 근처의 주차장까지 미리 체크해 둔다. 돌발적인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고 예상하지 못한 일에 대한 불안감이 크기에 원래 계획 외에 B, C 플랜도 세워 두는 완전 파워 J형. 그게 나의 본래 성향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생각하고 계획한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여러 사람들의 시간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곳에서는 더더욱. 그 시간, 서울역의 한편에서는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부당한 현실과 문제에 대해 거리로 나와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 간절하게 부르짖는 이들이 있듯이. 때로는 이러한 맞닿음은 예기치 못한 상황과 불편함을 야기한다. 당연히 불만과 짜증이 올라올 수밖에 없지만 그보다는 좀 더 유연한 사고와 시각으로 빠르게 다른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더 낫다.





걸어서 도착한 버스정류장에도 여전히 버스는 오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는 데 뒤의 어르신 두 분의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나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 분들 인 듯하다.

“5500-2번 타야 되는데, 버스가 너무 안 오네.”

“그러게. 집에 어떻게 가야 되지?”

“저.. 5500-2번 타고 가시는 거예요?”

“네! 맞아요. 우리 ㅇㅇ가는데 버스가 너무 안 와서..”


듣고 보니 두 분의 목적지가 우리 집 바로 옆의 아파트 단지이다. 지금 거의 1시간을 넘게 기다린 것 같은데 버스가 안 오니 어떻게 해야 하나 했다는 것. 택시도 안 잡혀 근처 호텔에서 자고 가야 되는 건가 고민 중이라고.


아. 역시 여기도 버스가 오지 않았구나.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지도 어플을 켜고 다시 길 찾기 버튼을 누르니 새로이 다른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길 안내가 뜬다. 그 찰나 저 앞에서 버스가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그래. 이 버스를 타자.

“우선 저 버스 타고 같이 가요. 저도 그 방향으로 가거든요. 같이 가면서 알려드릴게요.”


버스를 타고 가면서 어르신 두 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거주 중이고 한국에는 정말 오랜만에 들어왔다고. 언니집에 머무르고 있다가 다음 주에 돌아간다고 했다. 집 앞에서 바로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타고 명동의 면세점을 나왔는데, 토요일 시위로 발이 묶여 버렸고 오도 가도 못한 상황에서 나를 만난 것이다.


“너무 고마워요. 서울은 너무 오랜만이라 길도 잘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하나 했는데 덕분에 집에 갈 수 있게 되었어요. “


오랜만에 고국에 와서 너무 좋지만, 사람들이 전과 다르게 변해버린 듯 보이지 않는 벽이 세워진 듯한 느낌에 쉽사리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고. 집에 갈 수 있어 정말 다행이라며 환하게 웃는 두 분의 모습에서 전해지는 안도감에, 내 안에 남아있던 짜증의 감정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더불어 나의 내민 손이 그분들에게 꼭 필요한 도움이었음에 흐뭇한 마음이 더해진다.


사진출처 Unsplash


갑자기 일어난 상황(상당수는 그리 기분 좋지 않은 일일인 경우가 많다)을 통해 우연이 이어지고 다시 우연은 또 다른 인연으로 이어진다. 내가 만약 원래의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면, 그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다른 이의 선한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난 결국 타야 할 버스를 타지 못했고 좋지 않은 기분으로 다른 길로 향했다. 그렇지만 다른 길 위에서 만난 두 분 덕분에 짜증과 불만의 감정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도움이 되었다는 뿌듯함과 더 이상 늦지 않게 집에 갈 수 있다는 안도감이 자리하게 되었다. 나도 그분들에게 도움을 받은 것이다. 두 분은 너무 고마워하시며 계속 사례를 하고 싶다 했지만 난 괜찮다고 거절했다. 나의 작은 친절이 누군가에게 닿아 도움이 되었다는 행복감만으로도 충분했기에.


누구나 좋은 사람에 대한 갈망이 있고, 타인에게도 그러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양보하고 배려하며 예의 바르게 대하려 한다. 그에 반해 주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소한 친절을 베푸는 것에는 무심하다.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하겠지라며 그저 넘기고 있지는 않은가. 먼저 내민 작은 도움의 손길이야 말로 당신을 좋은 사람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할 수 있음을 기억하라. 분명 그 손을 잡은 이의 기억에 남아있는 당신은 참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아있을 테니.





어르신 미국 잘 가셨지요
부디 오랜만에 방문한 한국에
 여전히 따뜻한 정이 남아 있음을
기억해 주세요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소망합니다





그 어떤 친절한 행동도,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결코 낭비되지 않는다

이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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