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자기 주도적인 아이 되기
“사각사각. 슥슥. 사각사각.”
창문으로 들어오는 환한 햇살의 여운이 가득한 거실.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피아노 음악 소리와 종이 위로 연필이 지나가는 작은 마찰음. 탁자에 올려진 그림 도구와 종이 사이로 아이의 손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인다. 손가락이 지나간 하얀 종이 위에는 색색의 선이 피어난다. 점에서 시작해서 선이 되고, 선과 선은 이어지면서 이내 면이 된다. 면에 다양한 컬러들이 채워진다. 그렇게 종이에는 아이의 이야기가 가득 담긴다. 그림을 그리며 온전히 집중하는 이 시간.
아이는 완벽하게 자유로워진다.
7살이 되도록 루크의 입에서는 온전한 문장이 나오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몇 단어들의 나열. 의미 없이 단어를 소리 내어 반복하는 반향어. 그저 자신의 세계를 깊이 향유하던 아이였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5살이 되어서부터. 그전에는 손에 그림도구를 쥐어줘도 휙 던져 버렸고, 내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에도 관심 없이 자동차를 계속 굴리며 바퀴만 바라보았다.
어느 날 아이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서투른 손놀림으로 삐뚤빼뚤한 선과 동그라미를 종이 위에 무한히 그려낸다. 앉아 있는 자리에서 몇 시간이고, 작은 종이던 큰 종이던 가리지 않는다. 점점 그림은 점에서 선으로 그리고 면으로 확장되며 형태를 갖추어 나갔다. 아이의 결을 닮은 자유로운 그림들이 하얀 무대 위에 춤을 추며 함께 어울린다.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거침없이 종이 위에 자신의 세계를 펼쳐 낸다.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어떤 것에 몰입하고 집중하고 있는지 그림으로 가늠할 수 있었다. 언어적 표현이 자유롭지 않았던 시기, 루크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도구는 그림이었다.
그림은 아이의 언어이자 목소리이며
자신의 세계를 전하는 도구였다
루크의 그림에 자주 등장했던 따개비루는 최애 동화책이자 유일하게 좋아한 만화였다. 루, 벨라, 크루루, 페로, 잠보. 이름을 읊조리며 그림으로 그려내곤 했다. 만화에서는 언어로 주고받는 대화 대신, 행동과 의성어로 서로 소통하며 스토리가 전개된다.(다정한 목소리의 신애라 배우님의 내레이션과 함께)
어쩌면 그들이 소통하는 모습에서 자신과 비슷함을 발견하고 동질감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여전히 가끔 그림으로 나타나는 친구들은 깊은 영감으로 남아 있음이 분명하다. 함께 하는 즐거운 모습을 그리며 아이는 자신의 세계에서 나와 누군가와 함께 하고픈 소망을 담아 스스로 작은 날갯짓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 이리라.
아이가 6살이 되면서 우린 정원이 있는 테라스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생태 친화 어린이집으로 옮기면서 자연과 함께하는 일상을 누리게 되었다. 창문 밖으로 파란 하늘과 구름, 계절마다 색색의 옷을 갈아입는 산을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걸어서 갈 수 있는 작은 계곡과 나무들이 가득한 오솔길을 즐기고 오감으로 깊이 느끼면서. 아이는 곤충, 풀, 꽃, 나무 등의 자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자연을 좋아하는 아이가 되면서 생태 도감과 책들, 다큐멘터리를 가까이했다. 글씨를 읽지 못해도 책에 나오는 사진들과 다큐 영상을 보고. 자연을 관찰하고 오롯이 자신의 느낌으로 받아들이며. 느낀 대로 표현해 내는 아이답게 자연스레 그림으로 연결된다. 아이만의 감성을 듬뿍 담은 유니크한 모습으로 드러난 자연이 종이를 가득 채운다. 다양한 곤충들과 식물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이 담긴 그림들. 그림에서는 사마귀도 풍뎅이도 잠자리도 달팽이도 모두가 사이좋은 친구이다. 그림을 그리며 아이는 다르지만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오티즘 아이는 자신의 세계에 깊이 몰두하기에 주변에 관심과 흥미가 없다고 여겨진다. 그렇지만 이는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 싶다. 실은 누구보다도 간절히 소통과 함께함을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단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에 자신이 생각하고 이해하며 납득되는 방법으로만 전달하고자 한다. 그러니 당연히 소통과 관계에 서투를 수밖에 없다.
루크는 소통의 도구로 그림을 선택했다. 종이 위에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면서 누군가가 그 마음과 생각을 들어주기를 기다리며. 그림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아이의 세계는 깊어지고 확장되었다. 지금까지도 그림은 아이에게 있어 중요한 정체성이자 온전히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활동이 되고 있다.
그저 내가 아이에게 해준 일은 종이와 도구들을 주고 자유로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 것뿐이다. 옆에서 연필을 손으로 붙잡고 그리는 방법을 알려주기보다, 함께 그림을 그리며 자연스럽게 관찰할 수 있게 한다. 스스로 도구를 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아이가 주도하는 시간이다. 충분히 몰입을 하면서 즐길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줌으로써 아이는 자기 주도적이 되어 스스로 정한 방향과 속도대로 꾸준히 나아간다.
그렇게 그림으로 아이의 내면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더불어 정서적 안정과 자존감의 회복, 성장으로 이어졌다. 학교에 입학하기 몇 달을 앞두고 루크는 더듬더듬 문장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이는 곧 언어의 확장으로 이어지게 되어 지금은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소통을 이어갈 수 있는 아이가 되었다.
우린 이제 그림으로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한다 장애예술이라는 분야에 흠뻑 매료되어
루크는 장애예술가로서의 첫걸음을 내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