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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nnun Aug 15. 2019

누군가 나를 위해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Ecuador, Ayampe


신경질적으로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음악을 틀어 놓고 신나게 팬케이크를 굽던 중이었다. 문을 여니 키가 큰 사내가 서있다.


인사도 없이 대뜸, “여기 캠핑카 주차 금지라고 팻말붙어 있는 거 안보이시오? 돈 좀 내면 주차할 데가 많으니 다른 곳을 알아보도록 해요.”
 
남자는 엄한 말투로 자기 할 말만 내지르고는 자리를 뜨려 한다. 우리가 차를 세운 곳은 길도 아니고, 사유지에 주인의 허락을 받고 주차한 거라는 나의 설명은 그의 귓바퀴 근처에도 닿지 않는 모양이다. 손사래를 치며 설명 듣기를 거부하는 남자를 붙잡기 위해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니 아저씨, 저희는 여기 주인 판초 아저씨 허락받고 있는 거예요. 뭐 불편 끼쳐드리는 점이라도 있나요?
 
황급히 떠나려는 남자를 붙들어 세우고 재빠르게 설명했다. 대화하려는 자와 듣지 않고 떠나려는 자 사이에서 긴장감이 팽팽해지는 사이, 집주인인 요코 아주머니가 오셨다.
 
이봐요, 이 가족은 우리가 차를 세워도 된다고 해서 여기 머무는 거예요. 우리 땅인데 당신이 뭔데 와서 나가라 마라 하는 겁니까? 당신 가족이 다른 나라에 갔는데 동네 사람들이 내쫓으면 좋겠어요? 그러는 거 아니에요. 누가 누구를 내쫓는단 말이에요?
 
좀처럼 목소리가 커지는 법이 없는 요코 아주머니의 얼굴색이 붉어졌다. 남자는 꼬리를 내리고 아무 문제없으니 잘 지내다 가라고 말투를 바꾼다. 손을 내밀며 환영한다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캠핑버스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 일이 가끔 생긴다. 뜨내기 여행자들을 달가워하지 않는 주민들이 시비를 걸거나 돈을 요구하기도 한다. 앞선 여행자들로부터 생겨난 어떤 인상들이 그들 마음속에 부정적인 선입견으로 자리하고 있는 모양이다.

캠핑카를 어디에 세울까. 매일의 숙제다.
판초 아저씨 앞마당에 세든 우리 캠핑버스
바다바람이라는 이름의 판초아저씨 펜션
엎어지면 코 닿는 해변


키 큰 사내가 떠나고 요코 아주머니는 다시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셨다. 또 누가 와서 저렇게 시비 걸어도 우리가 여기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


걱정 말아요.

아주머니의 그 한 마디에 나는 먹먹해졌다. 가족도 아닌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싸움을 마다하지 않은 적이 있던가. 나는 지금껏 누군가를 지켜주기 위해 목소리를 높여본 일이 있었던가. 이 험한 세상에서 약한 누군가의 방패막이가 되어주며 걱정 말라고 단단히 손을 잡아 준 적이, 나는 없었다.
 
우리가 판초 아저씨와 요코 아주머니의 집 앞마당에 자리를 잡은 것은 닷새 전의 일이다. 에콰도르 해변의 아얌페(Ayampe)라는 작은 마을, 골목들이 좁은 탓에 캠핑버스를 세울만한 곳은 별로 없었다. 그저 큰길을 따라 해변 근처까지 들어가 보자 했다. 판초 아저씨는 바다가 보이는 길 옆에 작은 펜션을 가지고 있는데, 아저씨의 앞마당이 길과 별다른 경계 없이 이어지고 있어 자연스럽게 아저씨 집 앞으로 차를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펜션이라고 하지만 시멘트 벽이 훤히 드러나 마치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듯한 이층 건물, 그 위층에 얼기설기 꾸며 놓은 방 세 개를 제공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그래 봬도 그 방 세 개를 휴가철에 잘 부려 버는 돈으로 열명이나 되는 식구들이 먹고 산다.
 
우리는 8월 한 달 동안 새안이가 이 마을의 학교에 다닐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에콰도르 국경을 넘자마자 서둘러 도착하게 되었다. 인구가 300명 정도 되는 작은 마을의 초등학교에 70명 정도의 아이들이 다니고 있다.
 
무너져 가는 건물에 수업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던 초등학교는 일 년 전, 스페인 교육가인 세르히오가 정착해서 교장 자리를 맡으면서 완전히 달라졌다. 몬테소리 교수법으로 학교를 재정비해서 국제적으로도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한다.
 
무지개색으로 곱게 칠해진 문 안으로 들어가면 기다란 흙길 양쪽으로 온갖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초등학교 건물은 마치 숲 속의 작은 집 같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면 벽을 채운 낮으막한 책꽂이들에서 나무 향기가 난다. 낮은 탁자 위에는 갖가지 교구들이 정리되어 놓여있다. 교실 벽과 책상 곳곳에는 작은 쪽지들이 붙어 있는데, 아이들이 읽고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과제들이 적힌 것들이다.

바닷가 마을의 소박한 초등학교
아이들은 문제를 풀지 다른 걸 할지 스스로 결정한다

쪽지를 읽고 과제를 하는 아이들, 책을 읽는 아이들, 교구를 가지고 노는 아이들, 각자 흥미를 잡아끄는 것에 자유롭게 몰두하는 아이들이 섞여 있는 모습, 이것이 바로 이 학교의 ‘수업시간’이었다.
 
교실 밖에는 미술 활동을 하는 공간, 영어를 사용하는 공간, 요가나 카포에이라(춤이 결합된 일종의 무술)를 하며 몸을 쓰는 공간도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들은 요리, 체스, 과학실험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해서 특별활동을 하기도 한다.
 
남편은 “새안이가 부럽네, 나도 이런 학교 다녀보고 싶어” 하면서 웃었다.
 
등교 시간은 일곱 시 반이지만 새안이는 벌써부터 간식 가방을 챙겨 들고 빨리 학교에 가자고 졸라댄다. 평소 같으면 꾸물거리는 아침이겠지만 이곳에서 학교를 다닌 며칠 동안 세상 부지런한 아이가 되었다. 잔소리 없이도 이불을 정리하고 조금만 더 늦게 나가자는 엄마를 채근한다.

일등으로 학교에 도착하고 싶어 뛰어가는 아이, 일과를 마치고 환하게 웃으며 달려 나오는 아이, 지난 8개월의 여행 동안 새안이는 학교와 친구들이 참 많이도 그리웠나 보다.
 
정오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눈썹이 휘날릴 듯 점심밥을 먹고 밖으로 달려 나가신다. 온 지 일주일도 안된 마을에서 벌써 친구를 여럿 사귀었단다. 파도가 좋은 날엔 서핑을 배우고, 자전거를 타고 친구들과 달리기도 한다. 해변 끝 바위가 많은 곳까지 걸어가 조개껍데기를 줍거나 모래로 작은 도시를 만들기도 한다. 엄마 아빠보다 더 빡빡한 하루를 보내는 새안이는 누구보다 행복한 아이가 되었다.
 
덩달아 나도 오랜만에 글을 쓰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시비 거는 남자와 한바탕 싸운 그날 이후 요코 아주머니와는 둘도 없는 가족 같은 사이가 되었다. 사람과 친해지려면 뭘 같이 많이 먹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나는 매일같이 간식거리를 만들어 판초 아저씨 가족을 찾아간다. 맛난 걸 먹으면서 두런두런 대화도 나누고 쓸데없이 시비 걸던 남자 험담도 한다. 여기선 아침에 주로 뭘 먹냐, 새우는 어떻게 요리하냐, 자식들은 어떻게 지내냐, 사소한 것들을 이야기하다 보면 어제보다 오늘 한 발짝 더 가까워져 있다.
 
판초 아저씨는 우리가 도착한 그날처럼 거실 쪽으로 낸 창문을 통해 밖을 보고 계신다. 항상 그곳에 앉아 있는 아저씨가 있어 든든하다. 누가 와서 또 시비를 걸면 요코 아줌마를 아이처럼 부르며 달려갈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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