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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nnun Sep 08. 2019

긴 여행에서 쉼표를 찍는 일

Ecuador, Ayampe


집 앞에 작은 섬이 있다.


빵장수 오토바이의 삐삐삐 하는 소리가 들리면 잽싸게 뛰어나가 빵 한 봉지를 사고 곧바로 집으로 들어오는 일은 없다. 열 발자국만 걸어가면 바다가 있고 나는 오늘도 파도에 안부를 던지는 일을 잊지 않는다.


이른 아침이지만 바다를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는 두어명의 사람들이 눈에 띈다. 두런두런 각자 파도와 대화하는 모습이 다정하다. 파도는 사람들이 내미는 상념들을 스르르 걷어가고, 부드럽게 밀려와 위로를 내민다. 노란 빵 봉지에 손을 얹고 온기를 느끼며 잠시 서 있다. 어린 왕자가 그린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모양의 섬이 눈에 들어온다.  

이 마을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섬은 매일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다. 어느 날엔 아득하게 멀어 보이기도 했다가 또 어느 날엔 손에 잡힐 듯 또렷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안개 때문인지, 파도칠 때 솟구치는 물방울 때문인지, 새안이가 말한 것처럼 섬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돌아다니기 때문인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공기 안에 겹겹이 들어차 섬을 뿌옇게 흐리기도, 말갛게 드러내 놓기도 한다. 여행에서도 그렇다. 하루 동안 일어나는 자잘한 일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무게가 되어 여행 분위기를 밝게도 만들고 지루하게도 만든다.


아얌페(Ayampe) 마을에서 한 달을 사는 동안 흐렸다 맑았다 하는 섬 같은 마음이었다.


큰아이의 생일 파티를 준비하며 한껏 들떴다가도 여덟 달의 여행이 주는 무게가 마음속에 꽉 들어차 어디로도 내뱉지 못하고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풍경을 먹고, 여행을 먹고, 그것을 생각으로 씹어 넘겨 소화할 여유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그동안의 시간이 한꺼번에 체기로 다가왔었나 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 곳에 머물렀던 이 한 달이 그래서 소중하기만 하다.


멍한 시간,

이른 새벽 눈을 떠 이런저런 잡생각 사이를 맘껏 휘젓고 다닐 수 있는 시간,

아이들 없이 어슬렁어슬렁 동네 한 바퀴 돌아보는 시간,

감자를 사러 간다는 핑계로 나와 구멍가게 의자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는 시간,

그런 시간들을 잠시나마 누릴 수 있었다.


큰아이가 마지막으로 학교에 가는 날, 나는 아이가 섭섭해하지 않을지, 학교를 계속 다니겠다고 떼를 쓰지 않을지 내심 걱정이었다. 가방을 매고 씩씩하게 학교로 향하는 아들의 얼굴에서 그 속마음을 읽고 싶어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아이는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신난 모습이었다.


- 아들, 오늘 마지막 날이니까 선생님이랑 애들한테 인사하고 와!


- 응 알았어!


정말로 슬프다고 할까 봐서, 섭섭하냐고 묻지도 못했다. 그런데 정작 섭섭한 마음인 건 나뿐인가 보다. 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와서도 신나게 놀았고, 친구를 불러 땀나도록 뛰었고, 변함없이 간식으로 과자 나부랭이를 사달라고 졸라댔으며, 해가 질 때까지 최선을 다해 즐겼다. 내일 이 친구를 보지 못한들 뭐가 대수랴, 길에서 만나는 모든 아이들이 내 친구인데!라고 외치듯.


남편은 한 달 전부터 기다리던 차 부품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들떠 있었다. 오르막을 오를 때마다 엔진이 과열돼서 몇 번 애를 먹었다. 운전할 때마다 조마조마하던 남편의 마음을 조수석에 앉아 편히 가는 나로서는 백 프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한 달 동안 남편은 엔진 문제를 해결하는데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드디어 먼 나라에서부터 부품이 도착했고, 남편은 부랴부랴 버스를 타고 근처 도시까지 뛰어갔다. 오랫동안 헤어진 엄마를 만나기라도 하는 듯, 상기된 얼굴이었다.

오후 내내 씨름을 하더니 부품 교체에 성공하셨단다. 그리하여 이제 산으로 갈 수 있단다. 내일 출발이란다.


이른 저녁을 먹고 아얌페에서의 마지막 날을 즐겨보자며 밤마실을 나갔다. 그래 봤자 구멍가게까지 걸어가서 아이스크림을 각자 하나씩 입에 물고 돌아오는 것이다. 마지막 날이니까 동네 한 바퀴를 조금 크게 돌았다. 덕분에 새안이 생일에 피자를 만들어준 아르헨티나 청년들도 만나고, 학교 선생님도 만났다. 작별 인사는 이렇게 자연스러울 때가 가장 좋다.


나는 남편과 손을 잡았다가, 막둥이와 손을 잡았다가 하며 터덜터덜 걸었다. 일부러 발 뒤꿈치를 끌며 걷는 것은 기분이 삼삼하게 좋을 때 나오는 나의 습관이다. 길은 조명을 받아 오래된 귤 껍데기 같은 색으로 빛이 났다. 시멘트도 아스팔트도 깔리지 않은 이런 먼지 풀풀 나는 흙길을 오래도록 걷고 싶다고 생각했다.


막둥이는 엄마 아빠 손을 양쪽으로 잡고 하나, 둘, 셋, 하면 그네를 타듯 들어 올려달라는 시늉을 했다. 까르르 웃기를 몇 번 하더니 이번엔 손 잡기를 뿌리치고 와르르 앞으로 뛰어나간다. 그리고 다시 뒤로 또르르 뛰어온다.


- 하누, 하누, 여기!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땅을 가리키는데 하누가 땅에 있다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막둥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한 거였다. 뛰고 또 뛰어도 따라다니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 그림자. 알지 못했던 자기 몸의 일부분을 발견한 듯 흥분해서 뛰어다니는 아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안녕 안녕


그리하여 우리는 한 달이라는 쉼표를 찍었다.

 

엄마는 생각이란 것을 조금 할 수 있었고,

아빠는 오매불망하던 부품을 공수했고,

장남은 학교를 다니고 여덟 살이 되었으며,

막둥이는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떠돌이 삶에서도 이렇게 가끔 쉼표를 찍어 주는 것이 유익하다. 쉼표를 잘 찍으면 다시 움직일 힘이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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