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u, Los Organos
고래 노랫소리는 묘했다.
구슬픈 듯하면서도 힘차고, 애절하면서도 또렷한 소리. 우리가 낼 수 있는 어떤 발음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낮고 높은 톤의 악기 소리처럼 들린다.
열댓 명의 사람들이 탄 보트는 시끄러운 엔진을 멈추고 잠시 출렁거리는 바다 위를 부유하고 있다. 가이드는 특수한 마이크를 길게 뽑아내어 물속으로 내려보냈다. 사람들은 숨쉬기도 멈추고 바닷물 속으로 내려간 작은 장치가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물이 흔들리는 소리, 공기 방울이 보글거리는 소리, 가오리가 오가는 소리, 여러 소리들 사이사이에서 고래의 노래가 드문드문 들려온다. 마치 깊은 바다에 손을 넣고 헤엄치는 고래의 등을 쓰다듬는 듯하다.
솔직히 평생 고래에게 관심을 가져본 일은 없었다. 고래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에 무관심했다. 시골에 살았던 삼 년 동안 우리 집에는 개, 고양이, 닭은 물론이고 염소, 거위, 오리, 토끼 같은 다른 집에서는 잘 키우지 않던 동물들로 북적거렸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 많은 동물들을 먹이는 일은 우리 세 자매 차지였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게을렀다. 툭하면 동물들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고, 마음씨가 가장 곱고 이타적인 둘째가 항상 동물들을 챙기곤 했었다.
세상 문제를 혼자 떠안고 살던 사춘기 시기의 나에게 뽀얀 털의 토끼는 귀엽기는커녕, 새끼를 낳고도 물어 죽이는 잔인한 짐승으로 보였고, 밥만 먹고 늘어져 자는 개들을 볼 때마다 인상을 찌푸렸다. 거위와 오리들은 질펀한 똥 위에서 사는 것들로 대했고, 염소는 쓸모도 없는데 왜 키우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렸다.
개나 고양이 좋아해요? 어떤 애완동물을 키워보고 싶어요? 누가 물어오면 다 싫은데요. 밥 잘 챙기지 않아도 그럭저럭 사는 거북이라면 키워보겠네요, 라며 성의 없이 답하곤 했던 생각이 난다.
멀리서 버스까지 잡아 타고 고래 구경을 온 엄청난 무리의 사람들을 보면서도 그다지 흥미가 가지 않았다. 투어 가격이 저렴하지도 않은데 굳이 비용까지 들여서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남편이 고래 투어 업체 한 군데의 홍보영상 작업 일을 구해 왔다. 혹등고래를 보고 싶어 하던 아들을 위해서 특별히 신경을 쓴 모양이다. 장비를 목숨처럼 아끼는 남편이 흔들리는 작은 배 위에서 카메라를 쓰고 드론을 날려야 하는 위험을 감수한 것을 보면 아들 생각을 진하게 한 것이 틀림없다.
그리하여 나와 새안이는 이른 아침부터 구명조끼를 입고 다소곳이 보트 위에 앉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배가 많이 흔들린다고 해서 아침부터 물 한 모금 먹지 않았는데도 고래를 볼 생각에 새안이는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남극에서 적도까지 여행하는 혹등고래.
플랑크톤과 크릴이 풍부한 남극의 추운 바다에서 사는 혹등고래는 번식기가 되면 만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헤엄쳐 따뜻한 해류가 있는 적도 부근까지 이동한다. 새끼를 낳은 어미는 삼사 개월간 따뜻한 곳에 머물면서 아기 고래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친다. 아기 혹등고래는 그 몇 달 동안 숨 쉬는 법, 헤엄치는 법을 배우며 다시 남극으로 이동하는 긴 여정을 대비한다. 엄마 고래가 새끼 고래에게 수면 위로 점프하는 것을 가르치기도 하는데, 아직 체력이 부족한 새끼 고래가 수면에 몸을 부딪히면서 강해지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그렇게 멀고 먼 곳에서 헤엄쳐 이곳까지 도달한 혹등고래들을 만나러 갔다. 수면 위로 세차게 물을 뿜기 때문에 조금만 잘 관찰하면 육안으로도 고래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고래들은 각자 일정한 주기로 숨을 쉬러 수면 위로 오르는데, 특이하게도 호흡을 한 고래가 잠수를 하면 그 자리에는 다리미로 다려놓은 것처럼 팽팽하고 둥근 타원형의 모양이 남는다. 옅은 기름기가 떠 있는 듯 새겨지는 고래의 발자국 덕분에 사람들은 고래가 어느 방향으로 헤엄치고 있는지 짐작한다고 했다.
아가미를 갖지 못한 사연 때문에 물속에 살면서도 물고기가 되지 못한 고래들은 예외 없이 공기를 찾아 물 위로 오른다. 고래의 숨구멍으로 물이 뿜어져 나오면 이어 까맣고 반질반질한 고래의 등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물을 가른다. 까만 곡선이 물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동시에 부채처럼 펼쳐진 꼬리가 솟을 때도 있다. 망망한 바다 위에서 자신 몸의 지극히 일부분만을 드러내며 움직이는 것인데도 그 거대한 존재감을 감출 수가 없다. 사람들은 내내 입을 벌리고 환호성을 터뜨린다.
우리를 태운 보트는 혹등고래가 포착되면 고래가 움직이는 동선을 존중하며 옆으로 따라붙었다. 괴상한 소리를 질러대는 보트가 가까이 가면 고래는 커다란 꼬리를 수면 위로 거세게 치켜올리는데 그것은 고래가 물속에 더 오랜 시간 잠수하려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참 동안 수면으로 오르지 않고 자신에게 따라붙는 배를 따돌리기도 한다.
고래의 거대한 몸은 바닷물을 비단천처럼 두르고 있다. 한 번 호흡을 할 때마다 고래의 몸에서 반짝거리는 비단 같은 바닷물이 주르르 미끄러져 내린다. 맑은 날, 아침 햇살을 받으며 유유히 움직이는 고래의 몸짓은 우아하고 너그럽다. 저 거대한 동물이 음악 같은 소리로 대화하며 움직이는 동안, 그 옆으로는 뿌두두두두두두 철없는 갈매기같은 쉰 목소리를 내는 보트들이 기를 쓰고 따라간다.
이 망망하고 아찔한 바다 위에서 아무 쓸모도 없는 우리 인간들은 매캐한 연기를 뿜어대는 고철 덩어리에 의존해야 그나마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다. 두터운 바닷물 속에서도 부드러운 대화를 나누는 저 아름다운 동물을 보고 있자니 원숭이, 오징어, 꼴뚜기, 성게 알만도 못한 존재로 느껴진다. 지랄 같은 소음을 쏟아내며 달리는 이 보트라도 없다면 나는 그들 곁에 얼씬도 못할 일이다. 고철 덩어리 위에서 그냥 후루룩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든다. 순간, 나의 두 귓바퀴가 아가미로 변하고 나의 두 다리가 유연한 꼬리로 변할 수만 있다면. 고요하게 물을 가르며 헤엄쳐 저 아름다운 고래들 옆에서 잠깐이라도 유영할 수 있다면.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곳에서 유유히 멀어져 가는 혹등고래 무리를 보면서 나는 카메라를 손에 들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지 오래다. 그저 비단천에 몸을 가린 고래들의 수줍은 몸을 상상하며 그들 옆을 헤엄치는 상상을 한다.
한 무리의 혹등고래들을 떠나보낸 후에 멀미가 시작되었다. 아직 한 시간이나 투어 시간이 남아 있었으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옆에서 새안이는 이미 봉지를 양쪽 귀에 걸고 토악질을 하고 있다. 눈을 떠도 빙글빙글, 눈을 감아도 누가 나를 통째로 잡고 공중제비를 돌리는 기분이었다.
맨 앞 줄의 남자는 봉지를 미처 꺼내지도 못했는지, 배 난간을 붙들고 게워내고 있다. 아저씨, 아무리 급해도 바다에다 그러시면 안 되죠. 배 안의 사람들 중에 제정신인 사람들은 별로 없어 보였다. 한낱 인간 주제에 신의 모습을 감히 엿보려 하였으니 벌을 받아 마땅하도다.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성한 고래들의 춤사위를 몰래 훔쳐본 죄로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 그리고 땅에 발을 디딘 후에도 한참 동안 죗값을 치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