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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정원 Jan 27. 2021

Ep. 6 달리는 이유

달리기는 오스트리아 시골에서 시작했다. 딱히 달리기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달리기 붐이 일기도 전이었다. 다만 환경이 그러했다. 살인적인 월세는 둘째치고 강력한 문화재 보존법으로 묶여 있는 구시가지 건물 중 피트니스 센터의 까다로운 조건과 넓은 공간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14세기 건물 중에 수영장 배수시설이나 사우나의 고온과 습도를 감당할 수 있는 공간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하여 내가 다니던 체육관은 강을 타고 달리다가 대성당 앞 광장을 거쳐 구시가지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른 후 적의 침략에 대비해 11세기에 지어진 성을 옆에 두고 계속 달려 한때는 수도원이있던 거대한 맥주 양조장을 지나 한참을 헐떡이며 올라야 하는 언덕, 또 그 너머에 있었다. 자전거로 40분 쯤 걸렸는데, 체육관에 도착하면 늘 기진맥진 했다. 


긴 거리만큼이나 낮은 인구밀도의 영향과 오스트리아 특유의 정서가 뒤섞인 체육관 문화에 적응하는데도 한참 걸렸다. 운동기구를 쓸 때마다 매번 구비된 스프레이 소독제와 휴지로 닦아야 했고,  땀이 기계에 묻지 않도록 바쓰 타월 (큰 수건)을 들고 다니며 엉덩이와 등을 붙이는 모든 기구에 깔고 사용해야 했다. 조심스러워서 원… 지금 생각해봐도 이상할 정도로 위생적인 피트니스 센터였다. 심지어 스쳐지나는 사람들의 끝자락마저 늘 땀냄새가 아닌 뽀송향긋한 세탁세제 냄새여서 의아해하는 동시에 흠칫 스스로의 냄새를 확인하고는 했다. 


건물의 아래쪽 - 수영장과 사우나 -으로 내려가면 문화의 괴리감은 더 컸다. 한국에서 수영을 하려면 앞 사람 발을 치지 않는 한편 뒷 사람 손에 발을 맞지 않도록 정교하게 속도를 조절하는 능력 역시 반드시 익혀야 한다.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처럼 늘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 레인에서 원을 그리며 수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곳에선 표준보다 폭이 넉넉한 레인마다 두 명씩 자기 원을 그리며 수영장을 왕복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인구밀도의 5배가 넘는 나라에서 살다 온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개념에 직원에게 레인이 모두 꽉 차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면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라고 대답했고, 나 역시 결국 한 번도 모든 레인이 차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훨씬 맑고 깨끗한 호수가 그림처럼 지천에 깔려있는데 굳이 왜 좁고 약품까지 사용하는 답답한 수영장을 돈 내며 찾겠는가. 


Freikörperkultur - 지정된 지역에서 합의된 룰에 따라 나체로 자연을 즐기는 문화가 활발한 남부 독일의 영향권 하에 있는 지역이었던지라 수영장 옆 사우나는 세 종류가 있었다. 습식, 건식, 스팀…이 아니라, 남, 녀, 남녀혼용. 내가 즐기는 습식사우나는 남녀혼용에서만 가능했는데, 자연에 파묻혀 즐기는 남녀혼용 사우나가 익숙해진 한참 후에도 이 컨셉만큼은 도저히 익숙해 질 수 없었다. 위 층에서는 운동복을 입은 채 돌아다니다가 그 작은 사우나 안에서는 모두 벗고 얼굴을 마주한다는 개념이 참… 수영복을 입은 채로 사우나에 들어갈 수도 없었던게 그들은 이것이 ‘비위생적’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사우나에서는 땀을 흘리고 (물론 각자 수건을 깔고 앉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수영복은 땀을 머금은 채 몸에 붙게 되지 않는가? 그것은 위생적이지 않다… 라는 설명을 여러 사람에게 여러번 들었고 번번히 납득할 수 없었다.  


이런 연유로 있으나마나한 습식 사우나가 있는 피트니스 센터는 갓 세탁한 운동복이 있을 때만, 그리고 세-네 시간쯤 여유가 있을 때에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보통 에잇, 하고 늘 강을 따라 알프스 산들을 향해 달리는 쪽을 택했다. 전략적인 달리기가 아니었기에 할 수 있는게 두 개 밖에 없었다 -  거리를 늘리거나 시간을 단축하거나. 거리야 계속 달리다보면 하염없이 늘게 마련이다. 딱히 목표도 없이 마냥 달리는게 헛헛해져 대강 인터넷을 검색하여 아아아무 생각없이 빈 하프 마라톤을 신청했다. 


시합 전날, 간략한 운동복을 챙겨 기차를 타고 빈으로 향했다. 번호표를 찾으러 간 행사장은 거대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간이 쿵쿵거리는 음악과 잔뜩 흥분한 사람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밤이 되면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몽둥이 하나 떨어진양 울려 퍼지는 조용한 시골에 살다가 이런 도시의 역동적인 소음이라니!  나의 아드레날린 또한 덩달아 급속도로 치솟았다. 

온갖 스포츠 관련 업체들 부스가 내놓은 현란하고 강력한 색깔들로 어지러웠다. 그때만 해도 '지름이 지름길’이라든가 ‘운동은 템빨’이라는 인생의 진리를 모르고 그냥 시골길을 내처 달리기만 했던 나는 ‘달리기용 양말’에 (그리고 그 가격에) 충격 받았다. 왜. 달리는데. 특수한 양말이 필요한 거지? 에너지 젤도, 달리기용 물통도 벨트도 모두 처음 보는 물건투성이였다. 아드렐날린이 과다분비 되기 시작했는지 심박수가 증가하고 식은 땀이 나기 시작했다. 내 번호표를 찾아 주던 애한테 달리다가 죽을 수도 있는지 물었다. 그가 대답도 하기 전에 나 사실 내일 죽을까봐 겁난다고 덧붙였다.  


그날 밤 컨디션 조절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잠이 오지 않았다. 내가 뭘 몰라서 하프를 달리겠다고 달려 들었구나. 안절부절못하다가 긴장을 풀려고 티비를 틀었더니 마침 영화가 시작하던 참이다. 산악영화였다. 산과 호수가 많은 오스트리아에서 산악영화는 상당히 일반적인 장르다. 동네 작은 영화관에서 산악영화제를 열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영화관 벽에 등반가 마네킹들을 어설프게 설치해 놓고는 했다. 

영화는 나치 치하 오스트리아/혹은 독일의 두 동네 친구가 등반에 도전했다가… 둘 다 죽는 내용이었다. 한 명은 심지어 구조대를 코 앞에 두고 유언까지 다 전한 후 죽는 걸로 영화는 끝이 났다. 조난을 당했지만 극적인 반전 후 인간승리를 기대하며 끝까지 자리를 지켰는데 완벽한 참사로 끝났다. 반전이 없다는 반전이었다. 제길, 이건 독어권 영화지 헐리우드 영화가 아니라는 걸 깜빡했어. 티비를 끄고 충격에 멍하니 있다가 침대에 들었다. 내일 시합인데 내가 지금 뭘 본거지? 피니시 라인 전 몇 미터를 특히 조심해야겠어. 


(갑자기 왜 달리기 이야기가 나오냐면, 아마도 다음 주 쯤 밝혀질 예정이다. 그때까지 내가 이유를 알게 된다면... 아아... 이 글을 쓰고 나니 뛰고 싶네요. 마스크 없이 친구들이랑 떼지어서.)



Photo by Capstone Event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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