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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정원 Feb 03. 2021

Ep. 7 지속적인 경로 수정

대학시절 룸메이트가 나만 보면 끄집어내는 오랜 기억이 하나 있다. 기말고사 기간에 일찍 침대에 누웠는데 방문이 스윽 열리며 흙빛의 내가 들어 오더란다. 선형 대수학 기말고사 전날이었다. 중간고사도 아니고 기말고사 전날, 그것도 원서로 교과서를 ‘읽기’ 시작했으니 얼굴이 흙빛일 수 밖에. 친구는 책상 앞에 자리잡는 나를 보고 먼저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목석 하나가 전날밤 그 자세 그대로 책을 내려다 보고 있더란다.

“많이 했어?”

룸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반 봤어.”

꽉 잠긴 목소리가 암울하게 대답했다.


소설책도 아니고 수학을 ‘보면’ 뭐했겠는가. 수학에서 원리의 이해는 시작이지 끝이 아니며 적용하고 변주하지 못하는 이해는 이해가 아니다.

선형대수학은 결국 D를 받았다. 나는 선형대수학 과목을 좋아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성적표에 기록된 D가 그 기억에 의문을 제기한다. (아니, 더 솔직히 이야기하면 그 선형대수학은 결국 재수강하여 D+를 받았으므로 수학쪽의 항의는 조금 더 거세다.) 죽기 전에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꼭 한 번 다시 '보고' 싶은 책 중 하나다, 그 선형대수학 교과서는. 그 후로 영겁의 세월이 흘렀지만 옛 친구에게 같은 이야기를 수십번 들은 탓인지 아직도 초조해질 때면 이 날이 기억난다. 그리고 요즘 수시로 이 날이 떠오른다.


초조해지니 전 생애를 통해 수십번 반복해 온 오류를 또 한 번 반복하고 있다. 책을 구매하고 소유하는 행위로 마치 무엇인가 해냈다는 착각에 사로잡히고 그로부터 잠시나마 위안을 받는다. 그러나 이것이 꼭 망상만도 아닌 것이, 일단 책이 내 손에 있으면 지나가다 발에 차여서라도 들쳐보게 되고, 그러다보면 예기치 못한 페이지에서 영감을 얻거나 풀리지 않던 글의 실마리를 찾기도 한다. 일전에는 자주 가는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며 무심코 비치된 책을 들었다가 내려 놓치 못하고 빌려왔다. 홀 사용이 금지되어 있던터라 사장님도 흔쾌히 대답하셨다.

"천천히 보실만큼 보시다 돌려 주세요."

책은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였다.


첫 꼭지는 내용도 좋았지만 구성이 마음에 들어 몇 번이나 다시 읽었는데 인간의 가장 오래 된 플롯 - '추구의 플롯'을 실마리 삼아 여행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추구의 플롯이란 주인공이 간절히 원하는 바(표면적 목표)를 품고 길을 떠나지만 결국 다른 것(내면의 목표) - 보통 깨달음- 을 얻어 돌아오는 이야기 형태를 말한다. 김영하는 중국 푸동공항에서 추방당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출발해서 약 30년 전 첫 해외 경험이었던 중국 여행과 자신이 만들어 낸 세계로의 여행 - 소설- 등을 경유한다. 글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여기저기 거친 후 다시 여행의 본질로 돌아와 글을 마무리한다.


이 글에서 여러 에피소드들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실타래는 '불일치'다: 표면적/내면적 목표 사이의 불일치 (추구의 플롯), 눈으로 보는 것과 몸이 느끼는 것의 불일치 (멀미), 환상과 현실의 불일치 (파리 증후군). 애초에 추구의 플롯을 추진시키는 근본적인 힘도 불일치에서 시작한다. 유연한 여행가에게 (여행가의 앞에 놓인 것이 실제 여행이든 인생이든) 이 불일치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캐릭터로 재탄생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괴리를 견뎌 낼 수 있는 두둑한 베짱과 자신에 대한 믿음만 있다면.


그러고보면 글도 그렇다. 출발할 때 염두에 든 글이 있었는데 쓰다 보면, 그리고 예기치않게 경유하는 많은 타인의 글들을 겪고 나면 막상 모니터 위의 글은 다른 곳으로 가고 있다. 그래서 내가 정말 쓰고 싶은 글이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내 내면의 목표를 끊임없이 되묻고 경로를 수정하는 작업을 소흘이 해서는 안된다. 많은 경우 오직 완성된 글을 통해서야 자신이 쓰고 싶었던 글을 깨닫게 된다.  




Photo by Roman Mag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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