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육아휴직 최고의 효율은 '아이와의 시간'

by 김옥진

2020년은 전세계가 코로나19의 공포에 벌벌 떨던 시기였다. 집 밖 말고는 어디도 안전하지 않았다. 누굴 만나도 안심할 수 없었다. 큰 아이는 100일을 기점으로 본격 외출이 가능했어야 했지만, 늘 무서웠고 불편했다. 황금같은 육아휴직 기간에 난 외출금지당한 10대처럼 살아야 했다. 그런 나에게 황금 같은 제안이 계속 되었다. 책 출간 제안을 받았고, 온라인 기고 기회도 생겼다. 그렇게 만들어진 콘텐츠를 기반으로 총 3권이 탄생된 셈이다. 휴직기간에는 2.5권을, 복직하고는 0.5권을 완성했다. 그러니 나에게 육아휴직은 회사에서는 구현할 수 없는류의 생산성을 성취한 놀라운 시즌이 아닐수 없었다.


두번째 출산을 앞두고 나의 가장 큰 고민은 휴직기간동안 무엇을 해 생산성을 극대화시킬것 인가 였다. 뭐든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혀있었다. 하지만 나의 책 3권은 말하자면 40년간의 행운을 몰뻥한 것과 같다. 전문 작가도 아니고, 대단한 필력이 있는 것도 아닌 나같은 평범한 직장인에게 3권의 기획출간의 기회를 1년에 다 만들어낼 수있다는 것은 몇번을 생각해도 비현실적이다. 그와 같은 행운이 나에게 또 있을 수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 기회들은 로또였다.


다르게 말하면 나는 그 로또를 지난 육아휴직에 다 털어쓴 것이다. 난. 이번 육아휴직의 생산성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에너지도 없다. 큰 아이 육아와 임신이 병행되는 것 만으로도 이렇게 힘이드는데 아이를 낳으면 난 대체 무엇을 할수있을까? 딱 거기서 생각이 멈췄다. 엄밀하게는 무기력했다. 직장인 김옥진과 엄마 김옥진이 공존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지난 육아휴직의 놀라운 생산성은 첫 아이였기때문에, 그리고 내가 지금보다 어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어느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시간이 날떄마다 눕는 나를 발견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누워서. 누워서 한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움직일 의지가 없었다.


그렇게 아이를 낳고 6개월이 지났을 무렵, 회사 팀장님께 연락을 받았다. 잘 지내고 있는지, 아프지는 않은지, 아이는 건강한지,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건강하게 돌아오라는 인사가 오고가고 대화의 끝에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어차피 둘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테고,
지금은 큰아이에게 집중해서, 좋은 추억 많이많이 만들어줘요.



그때 뭔가가 머리를 탕 치고 지나갔다. 아. 나는 이 시간을 내가 아니라 갑자기 동생이 생겨 놀라버린 큰 아이를 위해 보내야 하는 시간이었구나. 이번 휴직의 생산성은 '큰 아이와 추억만들기'였어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은 들은 순간부터 우리는 가열차게 돌기 시작했다.


2월에 후쿠오카 4박 5일, 3월에 바르셀로나 10박 12일, 4월에 워터파크와 함께하는 1박 2일, 5월에 도쿄 4박 5일, 6월에 또다시 워터파크와 조개캐기 체험 1박 2일, 7월은 풀빌라펜션에서 2박 3일, 그리고 8월은 휴양림을 1박 2일로 2번. 당일치기까지 포함해서 8개월간 대략 34일간 함께 길을 나섰다. 매월 한번이상의 이벤트를 만들어보자는 굳은 의지였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왕복 30시간 이상을 비행기에서 보낸 바르셀로나 여행이었다. 대만이나 일본같은 가까운 거리는 비행기를 타보았지만, 그렇게 장거리는 나또한 안탄지 10년은 족히 된 터였다. 우리는 아이가 더 커지면 지금보다 2배는 돈이 더 들거야. 비수기에, 싼 비행기 티켓에 우리의 일정을 맞출 수 있을때 가자라며 육아휴직시기에 비상금으로 써야 하는 돈을 탈탈 털어서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아이는 어렸지만, 사실 장거리 여행은 어릴수록 차라리 쉽다는게 우리의 결론이었고 부러 중간에 아부다비에서 경유하는 비행기로 일정을 잡아 온가족이 출동했다. 거기에 큰 아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친한 동생을 내니삼아 동행하면서 부모 둘은 작은아이를, 동생은 큰 아이를 맡는 구조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비행기에서도 그냥 돌아가며 안고 눕히고를 반복하며 걱정보다는 수월하게 시간을 보냈다. 여행짐은 산더미였고, 비도 많이 와서 걸음걸음 힘들었지만 둘째가 뒤집기를 시작하고 빠른 발달과 성장을 하는 것을 보면서 채 뒤집지도 못하고, 이렇다할 이동에의 의지가 없을때 여행을 가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100번은 한것 같다. 한국보다 훨씬 더 키즈프랜들리한 도시였던 바르셀로나는 우리를 10일 내내 너무 행복하게 해주었다. 비오면 처마아래 비를 피하고, 햇살이 내리쬐면 햇볕을 즐기며 꿈에 그리던 파밀리에 대성당도 함께 다녀왔다. 황홀했던 그 순간의 기운을 나의 두 아기들과 함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더없이 행복했다. 차를 렌트해 멀리도 가보고, 바다도 가보고, 힘들고 지치는 여행이었지만 한톨도 후회하지 않았다. 아파서 드러누우면 일정 작파하고 누룽지를 끓였고 미리 챙겨간 미역국과 라면으로 속을 달랬다. 우리는 그곳에서의 시간을 '전생'같다고 표현했다. 어쩌면 그렇게 꿈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까? 힘들었지만 아무것도 힘들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꼭 가자며 바르셀로나 여행책도 챙겨두고 있다.


다음으로 잘한 선택을 꼽자면 큰 아이와 단둘이 떠난 도쿄 여행이었다. 도쿄는 비행기 티켓가격이 40만원이라 너무 비쌌고, 다른 도시는 썩 내키지 않아 고민하고 있던차에 마일리지 티켓이 넉넉히 남아있는 것을 보고 바로 도쿄티켓을 질렀다. 7살인 큰 아이는 이제 함께 다닐만 했다. 동물원, 과학관, 미술관, 놀이터, 대형 가챠샵 들을 돌아다니며 매일매일 미션을 수행하듯이 여행했다. 팀랩플래닛의 비현실적인 공간도 너무 좋았고, 오로지 공룡뼈를 보러 들어갔다 발견한 도쿄과학관의 어린이놀이터도 참 좋았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단 둘이 갔다는 것. 억센 아이였다면 엄두가 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큰 아이는 함께 여행하기 참 괜찮은 메이트였다. 오늘은 뭘 먹고싶은지, 내일은 뭘 먹을지 매일매일 이야기하며 식당을 찾아다녔다. 꼭 맛집이 아니어도 역전 우동일 지라도 아이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했다. 아이는 이제 바탑의자에도 제법 잘 앉아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이제는 1인분을 시켜줘야할만큼 양도 늘었다. 아이가 신나서 뛰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제일 기분이 좋았다. 그 흔한 드럭스토어 한번을 구경하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어느날은 친구와 함께 1박 2일을 보내고, 어느날은 엄마아빠와 이모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한달에 한번씩 이벤트를 만들었다. 이 모든것들이 내가 건강하고, 아이가 건강하고 가족 모두가 건강해서 가능한 일이라 생각하며 매일매일을 즐기는 시간을 보냈다.


바르셀로나를 함께 여행한 동생과 밥을 먹을때면 늘 이야기한다. "둘째 아이의 성장을 보고 있으면, 그때 여행 안갔음 어쩔뻔 했나 싶어요. 저렇게 활동적이어서는 우리 여행 못했어. 암만암만. 그때 아니었음 우리 여행 못했어" 라고. 전생이라기엔 너무 생생한 모든 여행의 순간. 다른건 다 잊어도 그 행복했던 기분만큼은 아이들의 마음에 남기를 바란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드디어 애착 인형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