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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옥진 May 16. 2020

인간이 액체만 먹고도 저렇게 클수 있다니

수유는 어렵다



아이를 낳고 병원에서 수유를 시작해 조리원에 왔다. 조리원에 도착할때까지도 난 어떤 엄마인지 감이 없었다. 조리원 원장님은 첫 면담에서 나에게 숙제를 내주셨다.


“수유에 대해 생각해본적 있어요?”

“아니요...”

“다들 임신과 출산만 고민하지, 아이의 수유는 고민하지 않더라고. 지금부터 고민해봐요. 얼마나 먹일건지, 어떻게 먹일건지. 언제까지 먹일껀지"


내가 예상, 아니 기대했던 수유는 최대한 아이가 내 몸에서 멀어지는 것이었다. 언젠가 있을 복직에 직접 수유는 적절하지 않아보였다. 아이가 태어나고 5개월차에 출근을 시도했다가 아가에게 분리불안이 와 결국 복직을 포기한 동료가 있었다. 엄마에게 그 친구의 이야기를 했더니 엄마가 그랬다. 아이가 엄마 살냄새를 알아서 그렇다고. 3개월이 지나면 아이는 엄마의 냄새를 구분하기 시작하고 6개월이 되면 아이가 엄마에게 강하게 애착을 갖기 시작하면 떨어지기가 힘들거라고. 그때 생각했다.


'아이를 낳게되면 나는 아이에게 직접 수유하지는 말아야겠다. 유축하고 우유통에 넣어 먹여야겟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먹게 해야겠다. '


그건 그저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나는 내 몸을 몰랐고, 또 아이에게 물어본적도 없다. 그저 막연하게 내가 원하는 방식만 정했을 뿐이다. 그리고 조리원 원장의 생각은 내 예상과 달랐다.  이미 병원에서 젖몸살이 살살 올라오고 있었고, 가장 좋은 해결방법은 반복적인 모유수유라고 다들 입모아 말했다. 모유수유로 계속 젖을 뺴주면 딱딱하게 뭉쳐 아픈 가슴은 한결 편하고 부드러워질거라고. 내 가슴이 수유에 아주 적당하다며 모유수유를 권했다.


갑작스럽게 태어난 아이.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멍때리고 아이를 맞은 미련한 엄마. 우리는 그렇게 조리원에 온것이다. 엄마는 준비가 안되어 있었고, 아이는 무엇인가 먹어야 했다. 뭉친 가슴은 풀어야 했고 아이에게 병원에서 배운데로 젖을 물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조리원 원장님은 왜 굳이 유두보호기를 끼고 아이에게 수유를 하냐며 그걸 뺴라고 했다. 병원에서는 내 가슴을 보자마자 당장 큰고영 시켜 사오라고 했는데 원장님은 그냥 없이 먹어도 잘 물텐데 왜 그 병원은 그걸 모든 산모들에게 사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직접 수유를 시작했다. 원장님의 말처럼 아이는 아주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젖을 물었다.

자기 말이 맞다는 걸 확인한 조리원 원장은 나의 가슴을 이래저래 만져보더니


"젖도 충분히 많고, 우리 조리원의 에이스가 되겠어"


라며 시크하게 나갔다.


나의 아가는 입이 짧았다. 아니 정확히는 위가 작았다. 아무리 신생아 위가 1cm밖에 안된다지만 다른 아가들은 30분씩 먹는다는데, 오른쪽 왼쪽 번갈아가며 먹인다는데 나의 아가는 한쪽만 10분 겨우 먹이면 배부르다고 혀를 내민다. 이미 이 아이의 의사표현은 병원에서 겪어 왔다. 먹고싶지 않으면 입을 꽉다물거나 혀를 쏙 내밀며 젖을 밀어내며 의사표현을 하던 아이이다. 조리원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가슴을 풀겠다는 생각에 아이가 먹고싶어할때마다 젖을 물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이틀이 지나자 문득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렇게 먹일수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 작은 아가를 아직 온몸이 벌건 이 신생아가 이 생각 없는 엄마의 모유에 만족하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가슴은 부풀어 있고, 어차피 넘치는 모유였다. 그럼 먹여보자.


난 조리원에서 마사지때문에 어쩔수 없이 못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수유콜을 다 받았다. 하루에도 아침 7시부터 저녁 10시까지 10번도 넘게 수유를 했다. 밤에는 그래도 자야 한다는 마음으로 밤 10시 이후의 수유콜은 받지 않고 분유 보충을 해달라고 했다. 식사시간에도 수유콜은 멈추지 않았다. 시계를 보고 먹일 시간이 다 된거 같으면 급히 먹거나, 아니면 맨 마지막에 가서 먹었다. 밥상에 앉아 숟가락만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은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아이가 먼저였다. 비록 배내짓이라고는 하나, 수유콜을 받고 아이를 품에 안고 방으로 들어가면 아이가 방긋 웃는다. 난 숟가락 위에 얹어둔 계란찜은 잠시 잊고 수유를 시작하곤 했다.


그렇게 2주간의 조리원 생활로 수유패턴을 몸에 익히고 집에 돌아왔다. 물론 조리원에서 돌아온 이후의 한달은 평화롭게 수유에만 집중하던 시간과는 하늘과 땅차이였다. 수유하고 자고 쉬고 마사지 받고 수유하던 평화롭던 2주는 이제 내인생에 더는 없었다. 1시간에 한번씩 일어나서 수유를 해야했고 다 먹이고 나서 트림시키고 나면 (조리원에서 집에 온 첫 2일을 제외하고) 그저 잠들어준 것 만으로도 감사할 지경이지만 체력은 바닥났고, 멘탈은 너덜너덜해졌다. 산후조리는 남의나라 이야기였고, 짬날떄마다 엄마가 집에 들러주면 그 덕에 좀 쉬었다.


엄마는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씻기고 나면 내 몸 이곳저곳을 눌러주고 마사지 해주었다. 산후조리 마사지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붓기를 빼주는 것뿐 아니라 1년가까이 무리해온 골반과 서혜부를 만져주면서 몸을 풀어주었다. 문자그대로 몸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잠시 정신을 놓고 있다 다시 일어나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난 그렇게 시작했다. 절대 아이에게 직접 젖을 물리지 않겠다는 다짐따위는 매우 부질없는 것이었다. 만약 내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싶었대도 아이가 물지 않거나 거부하면 소용 없는 것이었고, 또 유축을 하고 싶어도 유축이 제대로 안되고 아이가 물어야지만 젖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분유를 뱉거나 분유를 먹으면 분수토를 해서 어쩔수 없이 모유만 먹는 아이도 흔했다. 분유를 먹이고 싶어도 젖꼭지를 물지 않는 아이도 있다.  젖이 많아 선택지가 있었던 것뿐, 아이가 잘 물어주어 순조로웠던것 뿐. 분유와 모유를 가리지 않고 먹어주는 아이인건 천운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최대한 조리원과 비슷한 패턴을 유지하기위해 노력했지만 그건 철저하게 나와 생을 함께하는 동반자, 아이의 아빠이자 나의 남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이를 위해서 남편은 새벽시간을 포기했다. 낮에는 내가 아이에게 매달려 수유를 했고 새벽이면 체력이 바닥나 나가떨어진 나를 대신해 남편이 움직였다.


모유수유는 체력전이었다. 내 몸에서 아이가 충분히 먹일만큼의 모유가 나갈면 나도 충분히 먹어야 한다. 조리원에서 마사지를 받고 빠지지 않은 살들은 모유수유를 통해 차차 빠지고 있었다. 굶으면 안됬다. 아이에게 갈 영양분이 부족하다 뭐 이런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쓰러질거같았다. 수유쿠션에 발받침대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다하고 최대한 편한 자세에서 먹였지만 그런것으로 모유수유의 힘듬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아이에게 줄 영양분을 만들기 위해 내몸은 매우 빠르게 혹사되고 있었다. 집안일 중 특히 음식을 주로 담당하는 남편은 나를 위해 끼니마다 어떤식으로든 단백질을 식단에 넣었다. 정 안되면 계란에 참치캔이라도 따주려고 노력했다.


아이는 뱃속에서 평균치만큼 쑥쑥 컸던것 처럼, 세상에 나와서도 먹는족족 살이 붙기 시작했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딱 1주일에 200~300g씩 고맙게도 성장해주었고 100일이 되었을때 태어났을때 체중의 2배를 웃도는 체격이 되었다.


모유수유는 나에게 다른 차원의 만족감을 주는 행위였다. 막 태어나 신생아실에 있던 아이를 그 누구보다 먼저 안아볼수있는 기회를 주었고, 아이를 품에 안고 냄새를 맡게 하고 젖을 물리면서 자연스럽게 아이는 울다가도 내 품에 안기면 안정을 찾았다. 내가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절대적인 존재가 된적이 있었던가 생각하던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품안에서 쫍쫍대며 젖을 빠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점점 '행복하다' 느끼기 시작했다. 오로지 엄마만이 할 수 있는 케어였다. 기저귀갈고 목욕시키고 트림하고 옷갈아입히는 등등의 행위등은 다 누군가가 대신할수있지만 가슴을 직접 물려 맨살로 아가와 만나는 순간은 오직 모유수유시에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되는 유대감은 이루 말로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남편은 모유수유를 하는 나를 참 많이 부러워했다. 단순히 맨살이 닿는것만의 문제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이 행복한 모유수유에는 여러가지 복병이 있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유축을 하지 않고 직접 수유를 했는데,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밖에나가지 못했다. 출산을 하고 아무리 수술이었다고는 하나 몸이 정상일리 없고,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거나 회사일때문에 어쩔수 없이 나가야 하는 일도 생겼다. 유축을 해놓지 않고 밖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 가슴이 다시 단단하게 뭉쳤다. 집에가 부랴부랴 먹일래도 이미 분유로 보충해놓은 터라 아이가 다시 날 찾을때까지 버텨야 했다.


다들 수유텀이라는 것을 두고 규칙적으로 먹인다 하는데 나는 애가 배고파할때 먹이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배가 고픈데 잊고 자는 법은 없는 아이였다. 눈뜨면 먹고 트림하면 잤다. 2달이 되면서 부터 차차 자는 시간도 길어지고 버티는 시간도 생겼다. 규칙적으로 먹이는건 그 어린나이에 너무 가혹하다 생각했지만 규칙이 생기지 않으니 몸의 여유를 찾기가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제일 큰 문제는 역시 허술해진 몸둥아리였다. 아이를 안고들고 하다보니 골반이 뽀사지게 아파서 병원에 갔다. 임신의 여파로 척추는 휘어있었고 디스크도 튀어나와있었다. 임신기간중에 골반이 아파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그 통증이 디스크였던것이다. 매일 정형외과를 다니며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그마저도 코로나 여파로 중도에 포기했다. 지금 이순간에도 나의 척추는 휘어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자려고 눕거나 고개를 확 돌리면 핑돌며 어지러웠다. 앉아있다 일어설때 핑돌길래 빈현인줄알고 빈혈약을 먹었는데 그걸 먹는다고 호전되지도 않았다. 그러다 사고가 났다. 앉아서 바운서에 있는 아이를 안고 일어나다 눈앞이 까매지면서 온몸에 힘이 풀렸다. 아이는 손에서 미끄러졌고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신랑의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는데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신랑은 내 손에서 미끄러진 아이를 받아 안았고 너무 놀란 아가는 격하게 울기 시작했다.


난 너무 놀라 말도 나오지 않았고 어버버버하다 어찌어찌 주저앉았다. 정신이 들고 눈앞이 보이기 시작했을때는 남편이 놀란 아이를 안고 달래는 모습이 보였다. 그떄 남편이 없었다면 난 어쩔뻔 했단 말인가. 남편은 아이를 달래며 나에게 괜찮다고 말했지만 나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길로 병원에 갔고 내과와 이비인후과를 두루 돌며 내린 결론은 기립성저혈압과 어지러움증 2가지였다. 내 몸이 아프면 나만 아픈게 아니었다. 내가 아프면 나로인해 아이도 아플수 있다. 그걸 그렇게 뼈아프게 배우게 될줄은 몰랐따.


골반 통증도, 어지러움증도 약을 먹으면 되는 일이었다. 차차 없어질거라 했고, 골반통증도 무리하지 말고 지나가다보면 괜찮아지는 순간이 있을거라 했다. 약을 먹으면 수유를 못한다 했다. 난 버티기로 했다.


갑자기 가슴에 바늘을 누가 크게 쑤셔 박는것처럼 아팠다. 젖을 계속 물리면 괜찮아 질거라는 글들이 많았지만 난 그걸로 해결되지 않았다. 통증은 쉽게 가라안지 않았고 급하게 가슴마사지를 해주는 곳을 찾아 예약을 했다. 유선이 막혔다고, 바늘로 살짝 따고 근 1시간 가까이를 마사지를 받고 나서야 겨우 가슴통증이 사라졌다. 그떄때 조리원 원장님이 왜 나보고 젖이 많이 나올거라고 했는지 알았따. 나는 유선이 정말 많았다. 가슴에 오돌도돌하게 잡히는 유선으로 인해 모유가 많을 수 밖에 없는 몸이었다. 마사지를 해주시는 선생님께서 내손을 가슴위에 올려주시며 직접 확인시켜주셨다.


그렇게 하루에 10번씩 하던 수유는 차차 빈도가 줄어갔고, 역경과 고난을 겪어가며 100일을 맞이했다. 출산 직후 샛노랗던 모유는 3달이 지나자 히멀건 색이 되었다. 엄마는 이제 모유를 끊으라 했고, 나는 천천히 자연스럽게 끊어가길 원했다. 유축을 반복하다보면 젖이 줄어든다는 말에 유축 빈도를 조금씩 늘려나갔다. 처음에는 밤에만 분유를 먹였고(그마저도 아이가 심하게 울거나 잠이 안들면 밤에도 젖을 물렸다), 4개월이 넘어가자 밤에만 모유를 먹이는 상황까지 흘러갔다. 12월에 하루에 2시간을 11번에 나누어 모유를 먹였고, 그러면서도 3~5회 분유 수유를 병행했던 나는 급기야 3월 하순부터는 하루에 2~3회만 모유 수유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4월 26일부터 일명 '완분'의 세계에 들어섰다.


임신 4주차부터 무섭게 불어난 가슴은 3월말부터 훅 쪼그라 들어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작은 가슴이 되었다. 만약 내가 어지러움증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면, 디스크와 척추측만으로 병원에 다니지 않았다면, 골반이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면 그래도 나는 모유를 계속 먹이고 있을까? 생각하곤 한다.


180일을 넘긴 오늘의 아가는 하루에 3~5번 분유를 먹고, 하루에 2번 이유식을 먹는다. 분유통, 이유식통, 이유식만든 그릇들을 정리하다보면 아이한명을 위해 이렇게 많은 설거지를 할 일인가 싶다. 모유가 안나올까봐 안달복달 했던 시간은 끝났다. 이제 단유마사지를 받아야 할떄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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