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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옥진 Jun 07. 2021

일하는 엄마로 산다는 것

복직을 했고 6개월이 지났다. 돌아온 회사는 여전했고, 나의 업무를 받아 하시던 분의 작업 결과물을 보니 내가 복직 전에 하던 일의 2/3? 정도밖에 일이 없었다. 코로나19로 사업이 일시적으로나마 올스톱 되었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느라 바쁜 한해였기에 원래 하던 행사들은 취소되었고, 발행하던 발간물도 4권에서 3권으로 임시로 줄어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난 복직을 했고, 회사일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6개월간 정기간행물 3권, 비정기 간행물 3권을 털어냈고, 큰 행사를 2개를 치뤄야 했다. 최소한 행사 2개, 비정기 간행물 3개, 정기간행물 1개가 2~3월사이에 한꺼번에 돌았다. 일은 늘어졌고 상황은 틀어졌다. 왜 이걸 혼자 하냐고 묻는 상사에게 난 아무말도 할 수 없엇다. 그 소소한 순간들을 다 말할수도 없다. 어차피 그건 내 입장이니까. 내일 당장 해야할 수 많은 업무를 떠올리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던 일요일 밤이 몇번이 었던가. 모든것이 내마음같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흘러갔다. 5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주위를 둘러보고 상황을 다시한번 복기하고 챙길 수 있는 정신적인 여유가 생겼달까. 


그러는 와중에 아이는 자라났고, 또 아팠다. 엄마아빠의 실수로, 그냥 그럴때가 되서, 누군가에게 옮겨와서. 이유가 무엇이든 아이는 병원을 가야 했고, 약을 먹어야 했으며, 나는 밤잠을 설쳐가며 체온을 재야했다. 돌이 막 지난 아이에게는 흔한 증상이라는 말은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아이는 아팠고, 나의 마음도 함께 찢어졌다. 육아에 올인하는 것을 선택한 엄마들이 부러워지기도 했다. 아이가 아프면 아이에게 집중하고 아이 성장의 모든 순간을 함께 하고, 목표와 지향을 정해 함께 걸어가는 엄마. 인생에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캐릭터의 엄마가 점차 눈에 들어왔다. 그또한 갈길이 멀고 험란하겠지만 워킹맘이 돈이 아닌 '나'를 위한 이기적인 선택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때마다 착잡 했다. 


나의 엄마는 일하는 엄마가 아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난 초등학교때 우리 엄마가 일하는지 몰랐다. 저녁에 동생이랑 엄마랑 두런두런 모여 앉아 부업을 했던건 그냥 부업이었을거라 생각했다. 구슬꾀기, 종이봉투 만들기 같은 소일 이외는 엄마는 일을 하지 않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엄마는 우리가 집에 돌아올 시간 직전에 맞춰 끝나는 일을 늘 해왔었다. 그게 설령 파출부라도 게의치 않으셨다. 어려서 살던 성남집은 2층짜리 단독(다세대가 더 맞는표현일지도)주택이었는데 그 다닥다닥 붙은 건물 2층 창가에 엄마가 고개를 빼고 나를 반기면 난 그 앞에서 재잘재잘 오늘 있었던 일들을 원껏 다 말해야 그제사 올라오곤 했다고 했다. 엄마가 나를 학교에 보내고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안건 마흔이 다되서였다. 


그랬다. 우리엄마도 워킹맘이었다. 나와 내 동생이 상실감을 느끼지 않게 하고 싶어서 최선을 다한 보이지 않는 워킹맘.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베이비시터로 우리 집을 일으키셨다. 집에서 키우던 아이때문에 동생은 영구치가 부러지기도 했고, 집에 아이물건이 떠나는 날이 없었다. 고2까지 우리집엔 늘 아가가 있었다. 엄마가 그때 얼마를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시터에 비해 꽤 비쌌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엄마 밑에서 수십년을 컸다. 우리엄마의 치열함은 내 몸속에 유전자로 남아있다. 결혼을 하면서, 아니 결혼을 준비하면서 계속 생각했다. 아이가 태어나도 난 일을 할꺼야. 그러려면 어떤 셋팅을 해야 내가 버틸 수 있지? 나의 고민은 전부 거기에 가 이었다. 아이가 내 계획대로 될리도 없고, 그럴거라는 기대도 없었지만 나는 할수 있는 한도에서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아이가 태어났고, 나는 임신기간 10달동안 뭘 해야할지 내내 고민했다. 어린이집 신청방법도 찾아보고, 출생신고를 해서 주민등록번호가 나와야 신청이 가능하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아이의 이름(한자도)도 미리 정해두었다. 남편에게 부여한 아이가 태어난날 해야할 1번의 과업은 출생신고와 어린이집 신청이었다. 나의 1년은 바빴고 피곤했지만 건강하게 태어나 특별한 이슈 없이 순탄하게 자라준 아이 덕분에 난 마음이 산란한 순간은 거의 없었다. 돌이 지나도록 병원 응급실에 아이를 안고 내달린 적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감사하다. 코로나 상황에 아이가 응급실에 가야한다는 사실은 정말 암담한 일이다. 


나에게는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낳은 동료 엄마들이 있었고, 동료들의 사연과 동료 아이들의 성장은 내 일과 같이 느껴졌다. 아이가 첫 걸음마를 떼면 함께 기뻐했고, 아이가 고열에 시달리면 함께 마음 아파 했다. 7개월동안 뱃속에서 자라던 둘째 아가를 떠나보낸 친구도 있다. 이쯤이면 태어날떄가 됬는데 싶어 안부를 묻다가 아가가 하늘나라로 갔다는 사실을 들었다. 묻지 말걸, 그냥 아무것도 묻지도 말하지도 말걸... 아이를 멀리 떠나보냈다는 그 말을 그녀의 입에서 하게 하지 말껄. 몇번을 가슴을 치고 후회했는지 모른다.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어딘가 한귀퉁이에 여전히 떠난 아이를 기억하는 장치가 남아있는 것을 보면서 또다시 눈물을 흘려야 했다. 몇달을 뱃속에서 키우던 아이를 떠나 보낸 엄마의 마음만 하겠냐마는 우리는 그렇게 아픔을 공유하며 동지가 되고 있었다. 


복직을 했고 6개월이 지났다. 폭풍같이 몰아치던 업무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고, 이제 막 복직을 한 지인에게 커피 한잔을 보냈다. 아이가 고열에 시달려 출근 3일만에 휴가를 내야했던 나의 지인은 울먹거렸다. 


힘들꺼야. 6개월은 힘들꺼라 했는데, 진짜 힘들더라. 아가는 일하는 엄마를 받아들이기 힘들고, 회사는 엄마로의 나를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고, 엄마와 일하는 자아 사이에 방황하는 나 자신도 힘들고. 그게 몇개월간 무한반복 되면서 정말 힘들꺼야. 그래도 다 지나가요. 다 지나가니까 꺾이면 안되요. 아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기특하고 강하니까. 우리 버텨봅시다. 그래도 법이 바뀌어 휴직기간도 연차를 부여하니 우리는 그 연차 열심히 써가며 버텨봅시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나이가 몇이건 지금의 이 아이가 첫 아이이고, 어디서 무슨 일을 했건,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떻게 자랐건 그 첫 엄마역할이 무겁고 버겁다. 둘째를 낳는다 해도 역시 둘을 함께 키우는 것은 또 처음일 것이다. 4N년을 산 내가 오늘이 처음이듯, 573일을 산 내 아이가 그 삶이 처음이듯, 우리모두는 오늘이 다 처음이다. 스스로에게 조금 더 관대해져야 한다. 처음인 오늘이, 엄마로 처음인 나에게 너무 가혹해지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우리는 일하는 엄마. 직장을 나가야 하는 일이건,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살림을 꾸려가는 일이건 우리 모두는 일하는 엄마다. 일하는 엄마들. 힘내라. 나도. 당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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