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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옥진 Jan 13. 2022

처음으로 전업맘이 되고 싶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전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로부터 부고가 왔다. 부친상이었다. 오래 아프셨고 그 동료 역시 그런 부친을 케어하느라 많이 힘들어했었다. '내'가 없어지고 누군가의 부양인으로만 남아있는 시간의 괴로움이 조금은 추정되는 바.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마음이 복잡할까. 마음이 아팠다. 조문을 가기 위해 시간을 고민했고, 어린이집에서 아이가 온 후 아이가 잠들면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했다가 돌아올때 택시를 타면 되겠다... 생각했다. 강서구에 있는 우리집에서 문상 갈곳은 대략 서울을 대각선으로 질러 이동해야 갈 수 있는 휘경동이었다. 자차 이동이면 밤에는 수월하겠지만 택시비는 꽤 나올 거리.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려왔는데 아이가 매달리는 강도가 심상치 않았다. 원래 그 시간에는 아이는 늘 졸려한다. 오후 6시반에 데려오면 늘 그랬다. 아이는 피곤해했고 8시간만에 나타난 엄마에게 매달리기 일쑤였다. 어제는 강도가 좀 달랐다. 밥도 안먹겠다 나를 안아라. 엄마 품에서 먹겠다 아우성에 아우성이었다. 이미 의자에 앉아서 먹어라로 울고불고 한바탕 싸운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기억이 온데간데 없어진 것인가. 유난스레 매달렸다. 

내가 데려다 줄게


남편은 그런 아이를 보며 느낌이 온것이다. 아이와 단둘이 남으면 나는 죽는다. 베이비는 악쓰며 울 것이고 최소 30분 길면 1시간을 버텨야 하는데 나는 못한다. 뭐 이런 결론이 난거다. 남편은 카시트에 아이를 태웠고 우리는 그렇게 셋이 문상을 갔다. 물론 나 혼자 들어가기로 했고, 아이와 함께 차에서 버틸 수 있도록 각종 간식들을 챙겨서 말이다. 예의에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짧게 인사하고 나오자 했다. 혹여 극악한 상황이 와서 아이와 함께 들어가야 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 아이에게 붉은 계열의 옷은 무채색과 푸른계열로 바꿔 입혔고, 남편 역시 추리닝에서 청바지로 바꿔입으며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차에 탄 터였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차에 타서 10분이나 지났을까. 아이는 나가떨어졌다. 잠이든것이다. 엄마 손과 손톱에 애착이 있는 아이는 내 손을 잡고 만지작거리다 그대로 잠이들었다.


무려. 오후. 8시 40분에 말이다. 


요즘 아이의 수면패턴은 6시반 귀가해서 먹고 씻고 9시반~10시 수면이었다. 그것도 잘 자야 그정도고 11시를 넘기는 날도 허다했다. 아침에 아이와 함께 출근길에 나서서 나를 데려다 주고, 다시 어린이집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는 패턴을 유지하다보니 아이의 기상시간은 늘 7시30분이다. 그정도면 어른의 수면시간 정도 수준이라 늘 수면시간을 어떻게 하면 늘리나 고민이 되던차였다. 1년을 그렇게 다니니 아이는 졸려도 대충 7시 40분 정도면 눈을 떴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8시 40분에 차에서 잠든 아이는 새멱에 3시넘어 한번 꺠서 온집안을 돌아다니긴했지만, 그래도 다시 빠르게 잠이 들었고 7시 30분에 일어나 세상 명랑한 아이가 되어 소리지르고 뛰기 시작했다. 숙면. 그랬다. 아이는 8시 40분에 잠들어 11시간을 숙면하고 세상 멀쩡한 컨디션이 되어 일어난 것이다. 


아이도 졸렸을 거다. 아직도 주말엔 오전낮잠도 자야하는 아이다. 어린이집에서 신나게 노느라 피곤을 잠시 미뤄두고 2시에 낮잠을 자도 본인의 사이클과는 맞지 않았을테니 저녁에 6시가 되면 피곤한게 당연지사. 그런데 눈뜨자마자 헤어진 엄마를 6시가 지나야 만날 수 있으니 다시 잠은 뒤로 미뤄두고 놀아야 한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씻고 나와서 한번 집안을 뛰어다니고, 로션 바르고 또뛰고, 기저귀 바지 윗도리 단계별로 뛰어다녔다. 소리지르고 웃고 떠들면서 엄마에게 쉼없이 장난을 걸곤 했다. 얼마나 그 시간이 좋았던것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미안해졌다. 엄마랑 얼마나 놀고싶었으면, 이렇게 피곤한데 8시반에도 이렇게 나가 떨어질 것을 11시까지 버텼을까. 얼마나 엄마가 보고싶었던 것일까. 얼마나 엄마가 그리웠을까. 한없이 미안했다. 내가 만약 전업주부였다면 이 아이는 지금보다 더 일찍 자고 개운하게 일찍 일어나겠지? 저녁에 더 기분 좋게 밥먹고 기분 좋게 잘수있겠지? 생각이 많아졌다. 


이것이 응당 김옥진의 딸로 태어난 너의 숙명이야


늘 그렇게 말해왔다. 내 딸로 태어났다면 응당 이만큼 버텨야 한다고 말했던건 나의 오만이었고, 이기심이었다. 고작 26개월의 아기에게는 그 무엇보다 엄마가 필요했다. 유독 아빠보다 엄마를 따르는 아이다. 


세상 쌩쌩한 모습으로 일어나 옷을 입고, 차에 타고 회사 근처 카페에서 쥬스를 마시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와 생각했다. 그 아이의 인생에서 이런 순간이 또 얼마나 많이 올까? 나는 얼마나 많은 순간 그런 미안함을 안고 아이를 바라보게 될까? 나는 이런 마음을 견뎌낼 굳건함이 있는가. 이런 시간은 짧을텐데. 길어야 10년. 그 이후엔 이 아이의 인생에 내가 개입될 일은 급격하게 줄어들 것이고 나는 그 시간 이후의 삶을 위해서 일을 손에서 놓지 않을 생각으로 버티고 있다. 난 10년이 생각만큼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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