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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옥진 Mar 02. 2022

아이의 첫번째 이별. 선생님이 바뀌었다.

세상의 모든 어린이집 선생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아이를 낳은 그날, 남편의 TODO리스트 중 하나는 출생신고였다. 나는 수술 직후 고개도 들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잊지 않고 출생신고 부터 하라고 나섰다. 컴퓨터 앞에 앉는 남편을 보며 당장 일어나 주민센터로 가라고 했다. 뭐가 깔려있네 없네 제대로 된게 맞네 아니네 고민하지 말고 가서 출생신고 하고 오라고. 엄마가 옆에 앉아 내가 있으니 걱정 말고 다녀오게 보태주었다. 그때 시간이 오후 5시. 당장 병원 데스크로 내려가 퇴원하면 무료로 준다는 출생신고서를 굳이 3천원 주고 유료로 발급받아 주민센터에 갔고, 전화로 한자가 이게 맞냐(내가 그마저도 미리 다 찾아서 보내줬건만!), 본적은 어디로 해야하냐 같은 소소한 실강이 끝에 1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내 아이의 이름이 찍힌 주민등록 등본과 함께. 


오늘 태어났네요?


주민센터 공무원분이 아이의 기록을 받아 적으며 매우 놀라셨다고 했다. 그렇게 한 6개월쯤 지나고 투표하러 주민센터 갔다가 남편을 알아본 공무원분이 "이 아이가 그 아이군요. 많이 컸네요!" 라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무튼. 아이가 태어난 날 출생신고를 하러 온 유난스런 아빠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아이의 이름을 미리 지어놨기 때문이다. 독실한 기독교 시가가 좋았던건 이런거였던듯. 태어난 날이나 시에 맞는 이름을 작명소에서 받은것이 아니라 양가 할아버지의 이름에서 한글자씩 따와서 이미 7개월차에 만들어둔 이름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아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 미국인과 결혼한 시누의 아이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외국인의 성이 붙었다. 외양 역시 서양아이의 외모에 가깝다. 그저 머리가 좀 검을 뿐. 형제가 4인 시아버지의 집안에 황씨 성을 붙이는 첫 아이가 태어난것이다. 그래도 시부에게 이름지어달라 해야하지 않겠냐는 아버지의 조언을 뒤로하고 당당하게 양가에 우리가 지은 이름을 내밀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나의 시부와 친부의 이름에서 따온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난스럽게 아이의 이름을 빨리 짓고, 태어나자마자 출생신고를 했던 이유는 어린이집 대기때문이었다. 지금은 시스템이 그사이 또 바뀌어 상황이 다르지만, 내가 임신을 했던 2019년에는 아이에게 주민등록번호가 부여되기 전까지는 어린이집 대기를 할수 가 없었다. 예비워킹맘인 나는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지 않으면 나의 모든 사회생활이 정지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고, 복직을 하려면 어린이집은 절대적인 조건이었다. 당시 양가 어르신들이 다 일하고 계셧고, 설령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부탁하는 상황은 최대한 미룰 수 있는 만큼 미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등본을 들고 들어와 자리에 앉은 남편은 본격적으로 어린이집 대기리스트에 이름을 올렸고, 정확히 3일후(아직 퇴원도 못했을때) 집 근처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왔다. 상담 받으러 오겠냐고. 11월 언저리가 그렇게 대기 올리고 쭉 연락을 돌리는 기간이었던 모양이다. 일단은 어디든 올려놓자 생각하고 남편에게 다녀오라 했다. 뭘 보고 뭘 골라야 하는지도 모른체 같은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가정형 어린이집에 다녀왔고 등록을 마쳤다. 그리고 한 2달쯤 지났나? 동네 다른 어린이집에서도 또 연락이 왔다. 엄마에게 그런일이 있었다 말씀을 드렸더니 


그럼 새로 연락온 거기로 바꿔. 니가 지금 등록한 곳은 사실 별로야


엄마랑 10년전부터 같이 살던 아파트단지로 이사를 들어간 우리. 지금 살고있는 우리보다 이사간 엄마가 그 단지의 사정에 더 밝았다. 살때도 아침저녁으로 누굴 만나고 어쩔 시간도 없으셨던 분이 무슨 수로 그런 소식들을 다 들으셨는지는 알길은 없으나, 당시 엄마집과 같은 동에 있었던 첫 어린이집은 원장에 대한 소문이 좋지 않았다 했다. 선생님들은 좋지만 원장의 인품이 좋지 못해 선생님들도 자주 바뀌고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잘 해주려 해도 뭔가 원활하지 않다 했다. 뭘 해도 새로 연락온 그곳이 첫 연락 받은 곳보다 더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며 옮기라 하셨고 두번 고민 않고 이동해서 등록을 마쳤다. 아닌게 아니라 요즘 가끔 보며이는 풍경을 보면 잘했다 싶은게, 아침에 선생님들이 가끔 나와 차를 닦고 계신다. 물세차 까지는 아니고 먼지를 터는 정도인데 본인의 차라면 업무시간에 그걸 하면 안되고, 본인의 차가 아니고 누구의 지시로 하는 행위라면 납득이 된다. 그리고 그게 어린이집 선생님이라면 원내에서 아이와 부대끼며 입고있는 에이프런을 두른 체로 차를 닦는 모습에서 엄마의 그 막연한 설명이 뭔지 알것도 같다는 생각하게 만들었다. 


내 아이는 무려 5개월이던 시절부터 어린이집에 나갔다. 코로나가 창궐하는 그 와중에, 목이나 겨우 가누고 이제 겨우 뒤집기 시작한 그런 말도 안되게 어린 나이의 아기를 어린이집에 맡긴다고 놀라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적응하면 좋을꺼야. 아이에게도 느긋한 적응이 필요해.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어린이집에 본격 등원하고 1개월이나 되었을까. 선생님이 아이를 데리러 나올떄마다 들리는 아이울음 소리가 눈에띄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보다 월령은 한참 빨랐고 돌이 거의 다 된 그 아이는 엄마 복직이 확정되고 바로 어린이집에 맡겨졌다 했다. 2달은 다녔다 한걸로 기억하는데 적응 기간 없이 한번에 9to6로 어린이집에 맡겨졌고 선생님이 우리 아이를 받으러 나올때마다 그마저 본인을 돌봐주는 선생님마저 어디 가는 줄알고 그렇게 서럽게 운다는 것이다. 그 아기의 마음을 생각하면 안쓰럽기가 이를데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지금부터 다니면 천천히 적응해서 오히려 돌 지나고 더 잘 다닐꺼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를 키워보니 나의 예상이나 목표, 기대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모든 것은 아이에게 달려있다. 아이에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엔 1시간, 좀 지나면 2시간, 또 좀 지나면 4시간 이런식으로 체류시간을 차차 늘여나갔다. 어린이집에서 처음으로 혼자 시간을 보낸 아이는 소변도 보지 않고 돌아왔다. 분명 분유를 먹여 보냈고, 기저귀도 갈았으니 소변을 볼수밖에 없는 시간이었을텐데, 딴에 많이 긴장했었구나 싶었다. 그렇게 2~3달이 지났을 무렵, 어느 등원길에 난 너무 놀라버렸다. 아이가 선생님이 나오자 선생님을 향해 팔을 뻗은 것이다. 물론 선생님이 불러서였겠지만 아직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선뜻 곁을 내주지 않는 아이다. 그때 느꼈다. 


이 아이에게 선생님은 제2의 엄마구나 


마음을 놓은건 그때부터였다. 아이는 너무나도 잘 지냈고, 아이 몸에 이상이 생긴다고 느끼면 꼼꼼하게 기록하고 급하면 전화도 주셨다. 다행히 태생이 건강하고 잔병치레가 없는 아이라 그런 순간도 많지 않았다. 서툰 엄마에게 육아의 노하우를 전해주시는 멘토였고, 육아에 대한 불안감을 불식시켜주는 든든한 응원군이었다. 다들 어린아기를 보내고 괜찮냐는 질문에 난 단 한번도 흔들림 없이 "우리 선생님들 다 너무 좋아. 아무 걱정 없어. 아이도 너무 잘 따르고"라고 답할 수 있었다.  보조교사 선생님부터 야간반 선생님까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아이에게 진심이셨고 또 아이를 아끼고 사랑해주셨다. 물론 그중에서도 특히! 우리아이 담당선생님이 가장 든든하고 믿음직 스러웠다. 


어린이집 2년차에도 같은 선생님이 돌봐 주신다는 말에 크게 안심했다. 워낙 어린이집도 작아서 15명 남짓이 다였기에 다들 형제처럼 같이 놀고 하는 경우가 많아 사실 반을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는 없지만 그래도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2년이 지나고. 2022년 3월부터 드디어 담당 선생님이 바뀌신다. 선생님도 아이들과 2년이나 정이 들어 많이 고민 하셨지만, 그래도 4~5세 아이는 본인보다 더 잘 케어해주시는 선생님이 따로 계시니 그편이 낫겠다 생각했다 하셨고 아쉬운 마음을 가득 담아 장문의 문자를 보내주셨다. 나 또한 우리 아이에게 제2의 엄마는 선생님이셨고, 덕분에 아무 걱정 없이 일할 수 었었다고. 말로다 할 수 없는 그 감사한 마음을 짧게나마 담아 답장을 보냈다. 집 가까이에 지금 다니는 어린이집 만큼이나 가까운 거리에 있는 큰 어린이집에 대기가 풀렸다고 연락이 왔고, 오시겠냐는 물음에 나는 이곳에서 1년을 더 다니고 가겠다고 답한 나였다. 


아이에게는 아마도 이것이 첫번째 이별이 될것 같다. 물론 어린이집을 아예 바꾸는 것은 아니니 크게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아이가 '언니반 선생님'이라 불리는 반 선생님이 이제본인의 어린이집 선생님이 된다는 것을 차차 인지하게 되겠지. 


이별의 선물로 4세반에 쓸거라며 컵을 선물해주셨고 나는 깨끗하게 닦아 바닥에 이름을 써두엇다. 아이가 좋아하는 공룡이 한가득 그려있는 저 하얀컵은 아이가 크고 또 커도 선뜻 버리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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