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 바위~보!”
“가위~바위~보!”
“가위! 바위! 보!”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이 소리가 들린다.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올 때 수도 없이 해 보았던 가위바위보다. 어린이 세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유용한 해결 수단 중 하나다. 가위바위보로 결정된 사항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따르기 마련이다. 보통 편을 짤 때 가장 많이 이용한다.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일 때 가위바위보를 해서 원하는 물건을 선택한다. 오징어 게임을 할 때에도 공격과 수비를 정하기 위해 필요하다.
1학년 우리 반 미진이와 소연이가 사소한 일로 다툰다. 서로 자신들이 옳다고 바락바락 우기다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나에게 와서 심판을 요구한다. 내가 심판할 테니 믿고 따르겠느냐고 묻는다. 둘 다 고개를 끄덕인다.
“자 지금부터 가위바위보를 할 거야. 준비됐지? 가위바위보.”
구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작고 통통한 두 개의 주먹이 가위바위보를 한다. 공정하다는 느낌을 갖도록 세 번을 한다. 석 삼판이다. '왜 가위바위보를 하는 거지'라는 의문을 가질만한 틈을 주어선 안 된다. 자동적으로 손을 내밀게 하는 방법이 있다. 구령을 짧고 큰 소리로 단호하게 붙이는 것이다.
미진이가 두 번을 이겼다.
“선생님이 보기에 소연이가 조금 잘못한 것 같은데?”
아주 조금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엄지와 검지 손톱 끝을 마주 대고 꾹 누르며 두 사람의 얼굴 앞에 들이댄다. 이때 얼굴을 최대한 구기고 실눈을 뜨면 더욱더 '조금'이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둘은 연신 고개를 갸우뚱하며 서로를 바라본다. 싱거운 해프닝으로 끝이 난다. 다음 해 2학년 담임을 할 때에도 가위바위보로 잘잘못을 가려 보려고 시도해보았지만 1학년 이상의 아이들은 속지 않았다.
고학년으로 갈수록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에 가위바위보는 현격하게 줄어든다. 가위바위보로 정했다 하더라도 이의를 제기하는 일들이 많아진다. 고학년 체육 시간에 가위바위보로 팀을 짜서 피구를 한다. 한 팀이 이기고 한 팀은 진다. 이긴 팀이 승리의 기쁨을 제대로 만끽할 틈도 없이 진 팀 중에 한 두 명이 이의를 제기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들불처럼 진 팀 전체로 불만이 퍼진다. 편이 잘못 짜였다는 둥 상대 편 아이가 반칙을 했다는 둥 양 쪽으로 나뉘어 말싸움이 시작된다. 체육 시간 열 번 중 일곱 번 정도는 분쟁이 일어난다. 졌다는 것을 신사적으로 인정하는 일은 거의 없다. 가위바위보의 정통성에 생채기가 생기는 순간이다.
내가 큰 소리를 지르며 소란을 잠재워보려고 하지만 흥분한 아이들의 귀에 들릴 리 만무하다. 두 번째 방법을 쓴다. 목에 걸린 호루라기를 힘껏 분다. 아이들 전부가 나를 쳐다 봄과 동시에 고개를 돌려하던 일(말다툼)을 계속한다. 나도 계속 호루라기를 불어댄다. 수업 시간을 알리는 벨소리 ‘엘리제를 위하여’가 얼핏 들린 듯하여 한숨을 쉬며 벽시계를 본다. 복식호흡을 크게 한 후 크게 소리를 내지른다.
“야 이놈들아, 공부 시간 종 울렸다. 교실로 안 가나.”
그때서야 패잔병처럼 실실 교실로 사라진다. 공부 시간 삼분의 일 지점까지도 씩씩거리는 소리가 이따금 들린다. 억울해서인지 힘들어서인지 분간할 수 없는 한숨 소리도 들린다. 별로 재미없는 공부시간이 끝난다. 쉬는 시간에 세 놈이서 교실 바닥에 앉아 게임판을 펼쳐 놓고 또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다. 이 둘에게 체육시간의 일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다. 가위바위보는 어쩌면 행복의 척도일 수도 있다.
어른이 되어가며 가위바위보를 하는 일은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