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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casam Aug 04. 2022

가을운동회

 

 “선생님 이거 하나 드세요.”

 누군가 내 손에 박카스 한 병을 들이민다. 고학년 이어달리기 경기가 진행 중이다. 아이들은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각자 목이 터져라 응원한다. 아이들의 함성 속에서 나도 박카스를 준 분을 향하여 고함을 지른다. 

 “어머나! 감사합니다. 누구 어머니세요?”

 “예, 영민 엄마예요.”

 영민이 어머니도 고함을 지른다. 처음으로 나누는 인사다. 아이들 눈에 안 띄게 돌아서서 잽싸게 바카스를 마신다. 벌써 세 번째 마시는 바카스다. 내가 마시는 것을 확인하고는 활짝 웃으며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트랙에서는 달리기가 진행되고 가운데에서는 학급별로 청백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결승선 주변에는 점수 집계판이 있고 정해진 요원들이 경기가 끝날 때마다 달려가서 점수를 알려주면 집계 담당 선생님은 변동 점수를 표시한다.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청, 백 팀 아이들의 환호와 한숨소리가 교차한다. 

      

 아빠와 짝이 되어 손 잡고 달리는 저학년 경기가 시작된다. 네 팀씩 출발한다. 화약총 소리와 함께 아빠와 아이가 출발한다. 달리기를 잘하는 아이나 달리기를 못하는 아이나 다 같이 고난을 겪는 경기가 바로 이 경기다. 보통 한 두 명의 아이가 넘어져 우는 일이 꼭 생긴다. 학교에서는 학부모가 참여하는 경기를 위해 학부모 상품을 푸짐하게 준비하는데 이 선물에 눈이 어두운 아빠들 중에는 자기가 잡고 있는 손이 자식의 손이라는 것을 잠시 잊은 듯 마구잡이로 잡아끌고 달리기 때문에 벌어지는 부작용이다.

        

 이어지는 경기는 저학년 이어달리기다. 우리 반 대표 선수는 유진이다. 유진이의 결의에 찬 눈빛과 꽉 다문 작은 입에서 1등을 해보겠다는 비장함이 느껴진다. 유진이에게 배턴을 넘겨줄 선수가 점점 다가온다. 드디어 유진이가 오른손으로 청색 배턴을 받아 단단히 움켜쥐고 날다람쥐처럼 잽싸게 출발한다.   

 “유진이 화이팅!”

 동시에 일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유진아 그쪽으로 가면 안 돼!”

 내가 유진이를 향해 고함을 지르며 뛰어갔다. 

 유진이가 반대 방향으로 뛰어가고 있는 것이다.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유진이는 배턴을 받기 위해 자신을 향해 뛰어오던 친구를 바라보며 서 있었고 배턴을 받자마자 방향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뛰어나간 것이다. 관중석에서 사람들이 웃고 난리가 났다. 유진이가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오늘의 주인공은 유진이가 아닐까 한다.

      

 아이들의 응원 소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할 즈음 2학년의 점심바구니 터뜨리기 경기가 이어진다. 어떤 할머니와 어머니들은 경기가 끝나기 전에 점심 시간임을 눈치채고 음식 준비를 한다.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점심 바구니 터뜨리기는 어느 학교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경기가 되어버렸다.     


 운동장을 제외하고 학교 안에 있는 잔디밭이나 공터에는 빼곡히 돗자리가 펴지고 가족끼리 둘러 앉아 맛있는 점심을 먹는다. 김밥과 찰밥, 오곡밥 등 갖가지의 밥과 햇밤, 삶은 계란, 사과, 배, 찹쌀로 직접 만든 인절미, 식혜 등 집 안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은 죄다 가져온 듯하다. 서로 먹을 것을 교환하거나 나누어주기도 하느라 시끌벅적하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없는 사람들도 와서 아는 가족들과 같이 어울린다. 그야말로 안 먹어도 배부를 것 같은 즐겁고 정겨운 풍경이다.

      

 이윽고 체육 선생님이 오후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방송을 한다. 어른들은 돗자리에 앉아서 그대로 먹던 음식을 먹고 아이들은 응원석에 모인다. 이제부터 어른들은 자신의 아이가 아닌 경기에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특히 저학년의 경기는 오전에 거의 끝났기 때문에 돗자리에 앉아서 잡담을 나눈다.

      

 고학년 여학생들이 태평가에 맞춰 화려한 부채춤을 춘다. 구경하던 할머니들은 덩실덩실 춤을 춘다. 이어서 고학년 남자아이들은 기마전을 한다. 저학년 남자아이들은 와~하고 환호성을 지른다. 오늘 박수를 제일 많이 받은 종목이다. 그 동안 연습하느라 까맣게 탄 아이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반짝인다.

      

 할머니 할아버지 경기가 진행된다. 보통 처음부터 예상한 인원수가 채워지지 않는다. 고학년들은 안 나오려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사정해서 모시고 나온다. 40인치 이상 텔레비전이 들어갈 정도의 두꺼운 종이 상자에는 다양한 물건들이 들어 있다. 출발선에서 달려가 표시된 선에 멈춘 다음 갈고리가 달린 대나무 장대를 상자 안에 넣으면 물건들이 걸려 올라온다. 과자, 라면, 휴지 통조림, 사탕, 플라스틱 반찬통, 털신 등 생활에 유용하게 쓰일 만한 물건들이 고기 대신 걸려 올라온다. 사탕 봉지나 두루마리 휴지 등을 갈고리에 걸어주는 일은 상자 안에 몰래 들어가 앉아 있는 6학년 친구의 덕분이다.

      

 손님 모셔오기 경기가 이어진다. 출발선에서 10여 미터쯤 달려가서 땅에 놓인 카드를 집는다. 달려가면서 카드에 적혀 있는 사람을 찾아서 손을 잡고 결승선까지 달려가는 경기다. 카드에는 치마 입은 사람, 모자 쓴 남자, 색안경 낀 남자,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 머리가 긴 여자 등 객관적으로 보아 모두가 알 수 있는 특징이 적혀 있다. 달리기를 못 하는 아이들도 운이 좋으면 우승할 수도 있는 경기다.

      

 줄다리기 경기를 마지막으로 모든 경기는 끝이 난다.  교장 선생님이 조회대에 올라가 청군 백군 점수를 발표한다. 이긴 팀이 만세를 세 번 부르는 동안 진 팀은 축하의 박수를 쳐야 한다. 경기하느라 힘이 빠져서인지, 자기 팀이 졌다고 기분 나빠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진 팀의 박수 소리가 작다. 운동회 시작할 때 오른손을 들고 정정당당하게 힘을 겨루겠다고 다짐한 선서는 머릿속에서 이미 지워졌다고 봐야 한다. 이긴 팀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기 위해 온 힘을 다 해 손뼉 치라고 어린이들에게 주문하는 것은 무리다. 

       

 운동회는 한 해의 마무리를 학부모님들한테 선보이는 종합적인 공개 수업이다. 종합예술공연이라 표현하는 것이 맞을까. 바빠서 학기 중에 학교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학부모들에게는 자기 아이 교실과 선생님 얼굴을 처음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학교나 아이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과시할 수도 있으며 괜찮은 학부모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는 기회가 된다. 아이들은 덕분에 기가 펄펄 사는 날이다. 자기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든 다니지 않든 노인이든 젊은이든 학교의 가을 운동회는 그야말로 지역 잔치이며 만남의 장이다.      

 아침부터 힘차게 펄럭이던 만국기도 힘이 빠지고 끝까지 안간힘을 쓰며 버티던 태양 빛도 어느새 힘을 잃었다. 가을 걷이와 높아진 하늘 덕분에 더욱 넓어진 들판에 서늘한 바람이 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양 편으로 어른 키만한 코스모스가 싸리울처럼 늘어서서 바람결에 연신 향기를 흩뿌린다. 점심 때 먹다 남은 빨간 사과 한 입을 베어 물던 유진이가 말한다. 

 “엄마 다음 운동회 때도 올 거지?”

     

 잔치는 모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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