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장날

by ocasam

외지에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엄마와 떨어져 자취를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장날과 날씨에 관심이 많아졌다.

‘오늘은 운주장이구나. 비가 오려나 날씨가 끄무레하네.’

교실에서 공부를 하면서 매일매일 날씨의 변화를 살피는 습관이 생겼다. 뙤약볕 아래서 엄마가 얼마나 더울까, 비가 내리면 비를 맞고 있지 않을까, 눈이 날리면 엄마가 얼마나 추울까 걱정되어 마음이 무거워지며 밥맛도 없어졌다. 여름날 엄마의 얼굴은 청동색으로 그을리고 겨울에 엄마의 두 볼은 푸르스름하게 얼어 있었다. 손등은 거북이 등껍질 같고 손마디는 거칠고 부은 듯 퉁퉁했다.


엄마의 직업은 장돌뱅이였다. 40년 동안 오일장을 돌며 난전에서 채소 장사를 했다. 아버지는 장에 내다 팔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밭에 심고 가꾸었다. 온 가족이 등잔불 아래서 밤 깊도록 장거리들을 다듬고 준비했다. 바윗덩이처럼 무겁고 단단한 채소 보따리들을 정류장까지 리어카로 싣고 가서 완행버스에 올려주었다. 집에서 가까운 장터에는 직접 리어카로 물건을 실어 날랐다. 엄마는 판매, 아버지는 조달 및 운반을 맡았다.


1일은 운주장, 2일은 양촌장, 3일은 논산장, 4일은 두계장, 5일은 연산장을 순회했다. 철 따라 밭에서는 다양한 보물들이 나왔다. 산동추, 쪽파, 마늘쫑, 하지 감자, 오이, 땅호박, 가지, 열무, 토마토, 옥수수, 생강, 무, 시금치, 쪽파, 당근, 대파 덕분에 우리는 배를 곯지 않고 가끔씩 고등어나 비계 섞인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엄마는 물건을 남겨 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같이 장에 다니는 아주머니들은 물건을 다 못 팔고 남겨 오는데 엄마는 물건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거의 완판 시켰다. 엄마의 장사 수완은 고도로 뛰어났다. 파장 무렵이 되면 팔다 남은 시들해진 채소로 고등어나 명태로 물물 교환을 하기도 하고 가족들을 위해 이것저것 장을 봐왔다. 저녁을 먹은 후에 우리는 엄마의 앞치마 주머니에서 나온 얼룩지고 꼬깃꼬깃하게 접힌 돈을 편 다음 차곡차곡 정리해서 노란 고무줄로 묶고 돌아가면서 세어 보았다. 많지 않은 돈이지만 저마다 흐뭇해하며 굉장한 부자라도 된 것처럼 느끼기에 충분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하면 눈이 빠지게 버스를 기다린다. 아니 엄마를 기다렸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먹을 것이 들어 있는 엄마 보따리를 기다린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닮은 지치고 허름한 연하늘색 완행버스가 도착하고 엄마가 보인다. 엄마 얼굴은 본체만체하고 엄마의 손에 들린 홀쭉해진 보따리에만 눈독을 들였다. 엄마는 보따리 안에 먹을 것이 들어 있다는 나의 믿음을 깨뜨린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소매치기하듯 엄마의 손에서 잽싸게 낚아챈 보따리를 들고 집으로 쏜살같이 달려와 허겁지겁 풀어헤친다. 익다 만 듯 붉은색이 거의 없는 푸르딩딩한 사과나 볼품없이 반으로 쪼그라들고 차갑게 식어버린 풀빵이 들어 있다. 건빵이나 눈깔사탕이 들어 있을 때도 있고 잘게 으스러진 파래 섞인 생강 전병이 들어 있을 때도 있다. 부르지도 않았건만 설탕 조각에 달려드는 개미 떼처럼 어디선가 냄새를 맡은 동생들이 보따리 주변에 다 모였다.


엄마의 보물 1호인 광목 보자기는 닳고 낡아 꼬질꼬질했다. 흙이 묻고 눈과 비에 젖었다 말랐다 반복하며 반질반질하게 질겨졌다. 보자기에는 대파와 생강, 생선 비린내와 풀빵 냄새, 사과 향기와 엄마의 땀 냄새가 배어 있었다. 엄마와 똑 닮은 보자기 안에서 사시사철 일용할 양식과 옷과 용돈과 학교에 낼 돈이 나왔다.


40년의 장돌뱅이 직업을 그만두게 된 엄마는 뇌경색으로 고생을 했다. 다시 주름이 가득한 하얀 얼굴이 되었고 곱고 부드러워졌으나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한시도 자식 걱정을 놓지 않았다. 전쟁 같던 치열한 삶 속을 꿋꿋이 헤쳐 나온 엄마 덕에 우리들이 이만큼 잘살게 되었다고, 마음 편히 가지라고 엄마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어느 날인가 비밀이라도 털어놓듯 넌지시 나에게 말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너희들이 있어서 언제나 빛나고 따뜻한 봄날이었어.”


몇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엄마가 장돌뱅이로 떠돌던 오일장의 날짜와 엄마 보따리의 냄새가 생생하다. 이제 엄마는 내 곁에 없고 추억만 남았다. 밭에서 일하다 엄마와 함께 언덕 너머로 보았던 고운 노을과 진한 감나무 단풍을 기억한다. 산골짜기에서 불어오던 늦가을의 서늘한 바람 속에 퍼지던 엄마와 나의 웃음소리를 기억한다.


엄마의 채소전 바로 앞에 내 친구 성화 어머니가 운영하는 국밥집이 있었다. 장날에는 식당 앞마당에서 손님을 받았다. 햇볕을 가리기 위해 지붕 대신 늘어뜨린 누르스름한 광목천 차일이 바람에 멋스럽게 나부꼈다. 그 밑에 폭과 높이가 30센티미터, 길이가 3미터 정도 되는 테이블과 그보다 낮은 길다란 의자가 놓여 있었다. 가마솥에서 풍기는 구수한 국밥 냄새는 온 장안 사람들을 자석처럼 끌어들여 마치 잔칫날 같았다.


지금도 내 주변의 오일장에 관심이 많다. 1일은 거창과 산청장, 2일은 함양장, 3일은 장계장, 4일은 고령과 남원장, 5일은 안의와 장수장이다. 내가 오일장을 찾는 것은 장날에만 먹을 수 있었던 기가 막히게 맛있었던 순대국밥을 잊지 못하는 이유에서다. 옆 사람과 어깨를 부딪치며 쭈그리고 앉아 먹던 그 국밥을 잊을 수 없어 여기저기 다녀 보았지만 아직까지는 찾지 못했다.


3년 전에 나도 40년의 교직 생활을 하고 퇴직했다. 엄마 덕분에 대학이라도 나와 험한 일 하지 않고 편하고 안정적으로 직장 생활을 한 셈이었다. 치열하게 산 엄마의 삶에 비하면 내가 살아온 삶은 평탄하기만 했다. 엄마가 들으면 복에 겨워 그런다고 하겠지만 퇴직을 하고 나면 쳇바퀴 같던 생활에서 해방되어 무언가 획기적인 좋은 일들만 일어날 것 같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낮잠 같은 늦잠을 자고 아침인지 점심인지 애매한 식사를 하고 시간의 경계를 허물며 자유를 만끽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루는 여전히 예전의 그 하루였고 시간은 예전의 그것과 별반 다름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생과 직장인으로 수십 년을 돌리던 쳇바퀴는 좁고 작았지만 지금은 좀 더 커다랗고 안정된 쳇바퀴로 바뀌었다. 어쨌든 여전히 쳇바퀴를 돌리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생이 다하는 그날이 진정으로 완전한 퇴직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들은 기다린다. 그날이 오면, 그곳에 가면 지금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지금과는 다를 거라고. 그러나 내가 그날, 그곳에 와보니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산다는 일이 거기서 거기라고 말하는 사람들 말이 사실이었다.


기쁨과 슬픔은 섬유 조직의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있다고 하지 않던가. 엄마의 거친 광목 보자기가 사실은 비단 보자기였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은 쳇바퀴를 기꺼운 마음으로 돌리고 있다. 내 엄마처럼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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