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전시평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빈빈 Jul 09. 2018

발전과 발달저하의 양면: 인간의 도시성

2018.7.4 청주 신미술관 기획전 <사적영역>

인간은 결합과 분리의 공존을 통해서 결국 정체성을 형성해낸다는 구절을 본 적이 있다. 적절한 소속감과 적절한 자유의지 사이에서 사회에 통섭되어야만 삶을 연명할 수 있는데 그런 조율은 사실상 어떤 이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오늘날 사적인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의 정체성은 이데올로기에 사무쳐버린 무엇일지도 모른다. 그런 정체성의 크로노토프(Chronotope)를 극단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은 SNS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공론의 장을 변화시켰지만 도처에 감시와 처벌은 난무한다. 하지만 주체 자신이 자발적으로 감시를즐기는 아이러니한 형태도 있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미남의 유튜버가 자신의 공부 모습을 스트리밍 하는 방송이었는데 가장 자율적인 공간에 침투한 시선들은 대체적으로 얼평에 관한 말들이었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수많은 시선의 알고리즘은 눈치라는 인지작용을 거듭하며 사적 공간에 대한 정의를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그렇게 할리우드의 영화기법 중 하나였던 관음증의 시선은 이제 일상의 언어로 전복되어 색다른 이데올로기로 진화했고 또 다른 이미지들을 양산해나가고 있다. 

  정체성과 영역 그리고 사적인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빽빽한 질료로 이루어진 층위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18년 신 미술관은 <사적영역private area> 展을 통해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조화롭게 보여준다. 우리가 거주하며 생활하는 집, 집이 모여 생긴 도시, 그리고 공간, 어떻게 보면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소재이다. 마치 이것은 미술의 점, 선 ,면과 같이 위치, 시간, 공간들을 형성해내는데 각 작가의 작품들은 서로 다른 시공간 속에서 도시성의 양상들을 다른 층위로 보여준다. 

  고민규의 ‘옥상에서 바라본 하늘’은 흑백이라는 단색을 통해 전경의 광활함을 강조하면서, 색채의 축소를 통해 건물들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마치 거대한 일체 즉, 특색을 잃어버린 도시문명을 보여준다. 그림에서는 8:2의 비율 중 검은 하늘을 장대하게 표현하는데, 사람들의 여부와 상관없이 오로지 홀로 마주하는 하늘 속에서 인간존재의 나약함을 피력하기도 한다. 또한 김해진의 ’버려진 사물들‘은 사회의 변화와 그에 따른 주거 양식의 개편으로 부서지고 잃어버린 사물들을 설치, 드로잉, 화화라는 다양한 장르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증폭시킨다. 철거되어 쏟아진 건물의 자재들을 파란 파도와 결합시켜 결국 자연에 대한 사유로까지 확장시키고, 부서진 나뭇잎에 구멍을 뚫어 아파트의 형상을 만듦으로서 결국 유기적여 보이는 아파트를 분절된 관계와 동질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작가들 중 유일하게 다른 국적인 황하오빈의 ’이층‘은 다른 층의 의미를 내포하지만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웃, 서로 가깝다 여겨도,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는 이웃, 익숙하다고 여기지만 생소한 이웃 등의 생각들을 통해 오늘날 이웃에 대한 재 정의를 실천한다. 문학계에서 디아스포라 문학이 타국과 난민에 대한 모습들을 보여주자면 황하오빈은 매체 그대로의 로드무비를 통해 어느 순간 정체된 자신의 정체성을 거리낌 없이 표현한다. 자동차 블랙박스의 영상, 통화 내용, 녹음된 보이스 오버의 시청각은 부유하는 외로운 도시인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타인에게 나의 의미는 어떤 기호작용인가에 대한 성찰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오늘날 도시성의 가장 특징적 양상인 원룸촌의 모습을 빨대만으로 설치한 김도수 작가도 주목할 만하다. 전자에서 김해진의 작품 속 아파트를 언급하며 분절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오늘날 원룸촌은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고독과 가족해체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특히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오브제로 사용되는 빨대인데 빨대는 주로 무엇인가를 마시기 위해, 편리함의 도구로 사용되지만 쉽게 버려지고 재활용되는 사물이다. 더불어 사용된 카페빨대는 ’카페‘라는 공간에 대한 사유로도 이전된다. 계약 공간으로서 순환하는 원룸의 모습과 계속 재활용되는 빨대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편리함의 매개로 작용하며 작품과 오브제의 연관성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렇다면 카페라는 공간은 어떨까. 공적공간이지만 사적인 사건들로 나열된 인간행위의 나열로 볼 수는 없을까. 회사의 업무, 고시공부, 연관된 친분과의 시간들은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의 기묘한 결합을 통해 과연 도처에 존재하는 사적영역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 생각해 볼만하다.

  인간이 만들어낸 도시적 양태는 도로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인가. 문명의 급진성과 그로 인한 도시적 양태는 각 작가들의 모습대로 개개인이 체감하는 현실로 다가온다. 그것은 현상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데 맘충, n포세대, 소확행 등의 신조어들을 통해 오히려 문명의 종말을 보여주며 인간 소외, 행복의 자해를 급증시키고 있다. 발전의 거듭과 발달의 퇴행이라는 양면성은 도시성에서 인간성으로 이행되며 사적영역을 심리적 사회적 현상으로서 바라본다면 관객 모두는 발전과 발달 사이의 모순된 지점으로 내몰린다. 전시는 언제나 전시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보는 물자체의 현상들은 미술작품들을 통해 재현된다. 그것이 지극히 개인적일지라도 도시성의 양상들은 현대인의 집단적 무의식을 발현시키며 전시를 우리 모두의 책임으로 되돌아온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는 ‘우리는 무엇이고 본다는 것은 무엇이며 사물이나 세계는 무엇인지 자문하게 되면, 우리는 헤어날 수 없는 어려움들과 모순들에 봉착한다’.라고 말했다. 도시성의 양면 아래 작품들은 현재의 어려움을 보여주지만 미래의 난감함을 목도하지는 않는다. 결국 그 역할을 공동의 문제이며 목표이기도 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주변에서 생각하기부터 일상에서 관철하기까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