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짙은

뉴질랜드에 도착한지 2년, 계절은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

by Self Belief
계절은 명확하지 않다.


모퉁이를 돌면, 언덕으로 오르면, 어느 집 앞마당에, 공영주차장에, 공원에. 초록 넝쿨은 언제든 어디든 놓여있었다. 바람이 너무 불어서 걷기 조차 힘든 날에도 바람이 멈추는 어느 지점, 어느 순간에서는 살에 닿는 해가 너무 아플 지경이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바닷가의 미역줄기처럼 빗줄기가 바람과 함께 온몸에 척척 들러붙었다. 우산은 바람에 쉬이 뒤집어져 필요 없었다. 그냥 우비하나 걸치고 맨몸으로 온갖 비바람을 맞서 걸어야 했다. 온몸이 떨리도록 추운 날은 일년에 많아야 10일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콧속까지 파고드는 건조하고 추운 공기, 얼굴을 목도리에 파묻고 어깨를 한껏 움츠려야 몇 발작 걸을 수 있는 한국의 겨울과는 사뭇 달랐다. 어린아이들의 상의는 두터운 패딩점퍼, 하의는 반바지와 플리플랍이 겨울 교복이었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눈은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눈이 온 해를 손가락으로 셀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현재까지 그렇게 정확하게 두 해 반을 뉴질랜드 웰링턴에서 보냈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 온 방문과학자가 내게 ‘여기서 영원히 살거에요?’ 하고 물었다. 나는 ‘미래를 누가 알겠어요. 어찌 될지 모르지만 나는 당분간은 계획이 없어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뉴질랜드 웰링턴이다.


친구도 가족도 없이 정말 오롯이 나 혼자.


나는 친구와 약속이 잡혔다가 갑자기 취소가 되면 뛸 듯이 기뻐하는 사람이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너무 중요했다. 왁자지껄하게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보다 혼술이 나았다. 모든 면에서 나는 혼자가 편했다. 아주 친한 친구 한둘이 아니라면 나머지는 노동이었다. 혼자만의 그 고요한 시간. 누구의 말도, 행동도, 소음도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렇게 주말에 멍을 때리면서 티비를 보면 내 삶의 복잡함이 티비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 했다.


그래서 뉴질랜드에 도착한 후 한 1년정도는 내가 천국에 있는 듯했다.

드디어, 고요함에 도달했구나.

그러고 나자 처절한 과거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성경책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파라오에게 10가지 재앙을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 중의 하나가 어둠의 재앙이다. 한국어 성경에는 다르게 표현되어 있지만 내가 읽는 영어 성경에(NLT 버전)은 이렇다.


“Exodus 10:21 Lift your hand toward heaven, and the land of Egypt will be covered with a darkness so thick you can feel it.

천국을 향해 손을 들라. 그러면 이집트 땅이 어둠으로 덮힐 것이며 너무 두터워(짙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느낄 수 있는 짙은 어둠. 저주받은 듯한 어둠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뉴질랜드에 처음 왔을 시점부터 나는 여러가지 분노가 온 몸에 꽉 들어차 있었다. 알았지만 애써 아닌 척 했다. 그러다 하나하나 곱씹을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생기자 지난 인생들로 부터 시작된 분노와 절망의 더미들이 쓰나미 같이 밀려와 나를 덮쳤다.


내가 어릴 때 엄마는 피아노학원 원장이었다. 내가 9살때인가 전국 피아노 경연대회가 서울어린이공원에 열려서 엄마를 쫒아 학원아이들과 함께 간 적이 있다. 그 때 볼풀에서 신나게 놀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엄마도, 같이 놀던 피아노 학원 아이들도 없었다. 그 때의 그 놀람, 당혹감, 두려움은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길바닥에 앉아서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고래 고래 지르며 울었다. 엄마. 엄마. 하면서. 모르는 어른들이 내 손을 잡고 ‘엄마 잃어버렸어?’ 하고 물어도 나는 그 손을 뿌리치며 소리를 지르며 주저 앉아 울었다. 내 목소리를 듣고 엄마가 왔으면 해서.


나는 그 날 이후 처음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처럼, 그렇게 울었다.

뉴질랜드에 도착한지 약 1년 후였다. 물론 부모를 잃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길을 잃었다.

짙은 어둠이 결국 인생길에 내려앉았다.

내 울음 소리를 듣고 내 잃어버린 삶은 과연, 내 손을 잡아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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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