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달란트를 받아들일 용기

뉴질랜드에 나타난 패셔니스타

by Self Belief
나는 스스로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어느 날 부서 매니저와 얘길 하는 데 그가 ‘너 여기 연구소에서 옷 잘 입는 아시아애로 소문난 거 알아?’ 하고 말을 꺼냈다. 나는 깜짝 놀랐다. What?


한국사람들이 여기서의 내 옷차림새를 보면 웃을 것이다. 나는 지극히 평범하게 옷을 ‘매일’ 갈아입고 다녔을 뿐이었다. 청바지에 티셔츠. 그게 다였다.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옷을 잘 입는 게 아니라, 여기 사람들이 좀 묘했다. 옷에 구멍이 나도, 찢어져도 입고 다녔다. 우리나라였으면 뒤에서 흉을 봤을 거였다. 잘 씻지도 않는 사람도 많았다. 한 여름에도 패딩을 입고 다니면서 땀냄새를 풍기는 사람도 있었다. 한 겨울에 플리플랍을 신는 사람처럼.


물론 깨끗하고 정갈하다 못해 머리에 기름칠을 하고 빳빳한 포마드 헤어를 고수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성들은 제모를 필수로 하지 않는다. 제모를 하지 않아도 민소매를 입고 다닌다. 치마를 입어도 다리를 모으고 앉는 여성은 드물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자기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다녔고, 그래서 서로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내 옷차림을 관찰한 걸 보면 남을 아예 쳐다보지 않는 거 같진 않았다. 가끔, 내게 와서 그 옷 어디서 샀어? 이 신발 어디서 샀어? 하고 묻는 사람도 있긴 했다. 그러나 내 옷차림이나 행색이 그들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내가 그들에게 영향받지 않는 것처럼.




한국에서 한 번은 나와 같이 일하는 동료가 내 옷을 보곤 '어디서 샀어?' 하면서 내 목덜미 뒤편을 낚아채 브랜드를 확인한 적이 있다. ‘야, 왜 그래.’ 한 게 다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너무 폭력적이다. 다른 한 번은 평일에 친구와 놀다가 막차를 놓쳐서 친구네서 하룻밤을 자고 출근을 했는데, 다들 ‘오, 어제 집에 안 들어갔나 봐요. 어제랑 옷이 똑같네요.’ 하고 한 마디씩 거들었다. 내가 어제 입은 옷을 기억한다고?


그런데 나도 그런 적이 있다. 아니 많다. 기억은 정확히 나지 않지만 뒤에서 그 사람의 옷차림, 그 사람의 생김새 등에 대해 꽤나 많은 얘기를 했던 것 같다. 별 죄책감도 없었다.


내가 그런 적이 있으니, 남들도 나를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옷은 한국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하나의 척도였다. 오죽하면 패션테러리스트라는 말이 있을까. 옷을 못 입는 게 테러로 여겨지는 나라. 비단옷뿐이 아닐 거다. 사는 집, 몰고 다니는 차, 가방,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 그 모든 것이 어떤 척도가 됐다. 나라는 사람 됨됨이를 넘어서는 척도.


어느 날 뒤늦게 대학원에 간 내 친구가 펑펑 울면서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동창회를 갔는데, 나만 이 나이 먹도록 명품백 하나가 없어.’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기다. 그때 나이 서른이다.

서른이 뭐. 서른에 왜 명품백이 필요한데? 대학원생이 왜 명품백이 필요한데.


이러다 보니, 자꾸 보이는 것에 소비를 하게 된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월급은 그만큼의 품위비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금수저와 나를 비교하게 된다. 쟤네들은 발을 동동 거리면서 살지 않아도 보이는 것이 멀끔한데, 왜 나만.


옛날에는 생일날 부모님께 나아주셔서 감사하다고 큰절하라는 말도 있었지만, 말 그대로 옛말이다. 나조차도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당최 알 수 없으니 나보다도 아랫 세대의 사람들은 더욱이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사춘기 때 엄마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 ‘아니 그러게 누가 낳아 달래?’ 이 말을 듣고 엄마가 엄청나게 화를 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엄마가 화를 내는 이유도 사실 이해하기 힘들었다. 엄마가 화를 내니 더 해대고 싶은 말을 목뒤로 삼켰다. 진짜로 나는 궁금했다. 왜 나는 여기 있는 걸까?


분명 처음에는 세상에 대한 분노가 시작이었을 것이나 이는 곧 부모에 대한 분노로 번진다. 그러나 나의 부모도 자신이 자식에게까지 그런 소리를 들을 인생을 살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였다.




어릴 때 성경에서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구절이 있었다. 달란트 일화다.


주인이 먼 여행을 떠나며 3명의 일꾼들에게 5 달란트, 2 달란트, 1 달란트를 각각 맡겼다. 5 달란트 받은 일꾼과 2 달란트 받은 일꾼은 그걸 밑천 삼아 장사를 해서 각각 2배의 수익을 냈다. 그런데 1 달란트 받은 일꾼은 그 1 달란트마저 잃을까 두려워 땅에 숨겨놨다. 돌아온 주인이 5 달란트와 2 달란트 받은 일꾼을 크게 칭찬하면서 벌어 온 모든 돈을 가지라고 주었다. 오로지 땅에 1 달란트를 숨겨둔 일꾼에게 크게 화를 내며 게으르다고 욕을 하고 그 1 달란트 마저 빼앗았다.


애초에 주인은 돈도 많으면서 공평하게 줄일이지 왜 차별하여 1 달란트만 준 단 말인가? 차별 아니야? 1 달란트로 뭘 하란 거야. 화를 낸 주인이 좀 어이없다. 그런데 다시 살펴보면 2 달란트 받은 사람은 5 달란트 받은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갔다. 그리고 5 달란트던 2 달란트던 사업에 실패한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사업은 일단 시작하면 성공하는 것일 지도 몰랐다.


얼마이건 간에 누구나 장사의 밑천 정도는 가지고 태어날 것이다.


다른 이와의 비교, 온 세상과의 비교는 의미가 없다. 왜 나는 이런 부모 밑에서 태어나서, 왜 나는 이런 식구들을 두어서, 왜 나는 머리가 나빠서, 왜 나는 키가 작아서, 왜 나는 이쁘지 않아서. 등등 비교하면 나의 약점은 큰 산처럼 다가온다.


1 달란트 밖에 없다면 그 사실을 일단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이 1 달란트로 어떤 장사를 하는지 머리를 굴려보는 수밖에.




나는 그래서, 인생처음으로 1 달란트를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법을 천천히 시작하게 됐다. 머나먼 땅, 뉴질랜드에서.

스스로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인생에 쌓인 분노가 사그라졌냐고? 아니다. 그렇게 쉽사리 분노와 한이 사라질 리가 없다.


다만 나는 좀 더 명확하게는 자잘한 감사를 떠올리게는 되었다. 좋은 날씨, 그동안 나를 참아주었던 수많은 사람들, 내편을 들어주는 친구들, 나에게 웃어 주었던 사람들. 아프지 않고 자기의 몫을 해내는 가족들. 이런 하루 한순간이 내 분노를 좀 사라지게 했다.

딱 1 달란트만큼.


그러고 보니 뉴질랜드 사람들은 참으로 순하고 분노가 없다. 늘 상냥하고 잘 웃는다. 어쩌면 이들은 자기가 몇 달란트를 받았는지 모를지도 모른다. 아니면 실제로 몇 달란트를 받았는지는 상관없이 자기는 5 달란트를 받았다고 믿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건, 그들은 남이 몇 달란트를 받았는지 아예 관심도 없을 거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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