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의 문법, 언제? 어떻게? 왜?

150여 일째, 필리핀을 떠나기로 결정하기

by 파나오

마지막 날들은 힘들다. 혼란과 불안, 그리고 찰나의 감사와 두근거림의 연속.

분명 내가 한 결정이 맞는 거지? 답을 알면서도 되묻고 또 묻는다. 그 '나'는 내가 아닌 것만 같다.

카미긴을 떠날 때도,

그리고 보홀과,

제주를 떠날 때도 그랬다.


언젠가 스스로 떠나기 전문가라고 여겼다. 어린 시절 이사를 너무 많이 다녀서 어렴풋한 초등학생 이전 기억이 거의 없다. 어느 도시들에 살았는지도 전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다. 기억은 선이다. 연결점들의 춤이다. 이어지지 않는 경험들은 굵고 단단한 기억 덩어리의 뒷배경으로 서서히 흐려지고 만다. 나는 내게 주어지는 것들-친구, 나무, 놀이터, 집과 이웃들-이 언제든 눈앞에서 송두리째 사라질 수 있는 시절을 보냈다. 누가 '넌 어디에서 왔어?' 물으면 답할 수 있는 장소가 없다. 내가 거쳐가고 나를 거쳐간 모든 장소에서 왔다고 할 수 있을까? 지구 공기와 땅 위를 끊임없이 순환하는 물처럼.


그래서 내가 물, 그중에서도 바다와의 연결을 특별하게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7살 무렵 2년 정도는 바닷가 마을에 살았었다. 그마저도 곧 사라져 버렸지만. 아마도 그 다음으로 이사 간 곳에서 수영장에 다니며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물은 내게 가장 오래 관계 맺어 온 집이자 고향처럼 느껴진다. 나의 몸과 물이 얽힌 역사를 떠올리면, 온갖 소리와, 냄새, 느낌, 색깔이 감각기관 끝에 몰려온다. 언젠가 수영장에서 수영 강습이 끝나고 축축하게 젖은 몸으로 탔던 버스, 그 안에서 코를 찌르던 떡꼬치 향기까지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물놀이가 끝나면 늘 무지하게 배가 고팠다. 물에서 놀 땐 망설임 없이 움직일 수 있어서였다.


마지막으로 원치 않는 이사를 한 건 열두 살 때였다. 그곳에선 그래도 육 년을 살았고, 지금까지도 그게 어느 한 곳에 살았던 가장 긴 기간이다. 내 삶에서 가까운 친족을 빼놓고는 열두 살 이전의 사람들은 모두 기억에서 흐트러져 버렸다. 누구나 그와 비슷하게 살아가는 줄 알았다. 그렇지 않다는 것, 유년기의 기억 중에 소화되지 못한 고통의 기억들은 무의식의 서랍 속으로 가라앉기도 한다는 건 성인이 되어 심리상담을 받으며 알게 되었다. 상담자 선생님과 차근차근 기억의 지하실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늘 체구가 자그마했던 어린 나는 세상을 잃는 일이 분명 무섭고, 슬프고, 막막하고, 불안했을 테지만 그걸 표현하는 대신 꾹꾹 삼켰다. 삼키고 삼킨 고통들은 결국 눌러도 아프지 않은 굳은살이 되었고 종국에는 훌쩍 떠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어버린 것이다.


누구나 어린 시절 터득하지 못한 소양을 나중에야 서툴게 다시 배우기도 하고 그걸 "재양육"(reparenting)이라 부른다고 한다. 나는 그걸 다시 배우려고 유랑 생활을 하는 중일까? (사실 이번 유랑뿐 아니라 20대의 거의 모든 여력을 여행 다니는 데 두루 썼다.) 다른 누군가의 영향이 아닌 온전히 나 자신의 힘으로 떠날 시간, 방법, 장소를 정한다. 그리고 떠난다. 이 활동을 반복하며 굳은살이 박혔던 '떠남에 대한 무심함'이 서서히 말랑해지는 걸까.


필리핀과 까미긴을 떠나기로 결정하고, 그에 따른 온갖 감정들을 혼자 감당해 내는 것은 내 예상보다 훨씬 큰일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노동자를 겸하는 저예산) 장기 여행자로서 마주하는 대부분의 감정기복들 어느 것 하나 수월하지 않다. 낯선 곳으로의 모험이 주는 순간의 흥분감 뒤에는 어느덧 권태감이 찾아오고, 국경을 넘으며 취약해지고 외로움에 위축될 때면 일시적 지지관계를 찾아 나설 힘조차 나지 않을 때도 있다. 무엇보다 상실감이 자주 든다. 관계 맺는 모든 물건이 정주할 때보다 적은 만큼, 작은 소지품 하나라도 고장 나거나 잃어버렸을 때의 타격감이 크다. 여행자 커뮤니티의 특성상 사람을 떠나보낼 일도 훨씬 잦다. 그런가 하면 떠나온 인연들, 나를 깊이 이해해 주고 바라봐주던 이들이 생각나 속이 아릴 때도 있다. 모험이 주는 흥분과 만족감의 이면에는 꼭 그만큼의 그림자가 있다. 그럼에도 떠나기로 결정한다면 이 그림자들마저 정면으로 마주하고, 굽이굽이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게 떠남을 제대로 '짊어지는' 방법이다.


카미긴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준비하는 데 몇 주가 걸렸다. 짐을 정리하고, 떠나는 날을 고르고, 배표를 예약하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날은 눈물이 차오르기도 했다. 어떤 이들과는 차마 더 긴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미루고 미루다가, 끝내 형편없는 인사를 남기고 도망치듯 떠났다고 느꼈다. 심지어 사소한 실수로 트집을 잡아 부러 밀어내려 한 친구들도 있다. (나중에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사과했고, 감사히도 이해받았다.) 그런 나를 나는 이젠 이렇게 이해한다. 과거의 모든 나누지 못한 작별들이 우루루 일어나 사지를 짓누른 때문이란 걸 이해한다. 마비되었던 신경조직이 녹아내리듯 풀려나는 그 과정에서는 서툰 것이 당연하다. 떠남이 어렵다는 걸 강렬하게 느끼기 시작한 것만으로도 대견하다.


떠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떠나고 또 떠나며 다시 배우고 있다. 떠날수록, 아프고 혼란스럽고 두려워하면서도 떠날수록, 떠남이 쉬워지지 않는 게 나에게는 치유의 방향이라 믿는다.


마지막 날들에도 나를 불러주고, 바라봐주는 인연들. 짧지만 반짝이는 연결 덕분에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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