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째부터 300일째까지의 코바늘 뜨기
이번 이야기는 '빈 시간'에서부터 시작한다. 무언가로, 필요나 약속들로 채워지지 않은 시간. 생존을 위한 노동도 아니고, 과거로부터 미래로 뻗어나가는 계획들에 붙잡히지 않는 시간 말이다. '취미', '여가', '휴식', '워라밸'과도 모두 미묘하게 다른 개념이다. 굳이 고르자면 '남는 시간'이 가장 가까운 단어이려나.
자본주의 구조에서 '소비'에도 '생산'에도 속하지 않는, 그래서 '이렇게 하루를 낭비해 버려도 괜찮을까...' 하는 식의 불안을 유발하기 쉬운 시간이라 상상해 보면 더 와닿을지도.
바닷가 근처의 삶이란 모름지기 이 빈 시간이 많아야 되는 법이라고, 바닷가 근처에 산 지 오 년 차인 지금 생각한다. 그래야 그 빈 시간만큼 바다를 누릴 수 있다. 해지는 바다의 변하는 색채를 눈에 담을 수 있다. 하염없이 해안산책로를 걸을 수 있다. 바다생물이 나타나길 기다릴 수 있다. 바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도록 둘 수 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바닷속을 유영할 수 있다. 태풍에 춤추는 파도 구경을 할 수 있다. 배가 고파지거나 추워서 콧물을 훌쩍일 때까지 바다에 머물 수 있다. 슬플 때의 바다, 기쁠 때의 바다, 화날 때의 바다, 답답할 때의 바다를 만날 수 있다.
바다는 우리에게 많은 소비와 생산, 각종 '쓸모'의 장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도 훨씬 크다. 바다가 우리의 쓸모를 하찮게 만들어버릴 정도로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우리는 바다 가장자리에 삼켜진다. 바다의 가장자리가 주는 압도감을 사랑한다. 바다의 가장자리에서 나는 내 삶의 가장자리 시간을 보내길 좋아한다. 지면 위에선 여백이라고 부르지. 중요하다고 여기며 살아온 것들의 여집합.
바다에서 살아가는 삶이란 그 가장자리 같은 시간을 오롯이 껴안는 '시도'다. 그 시도를 이해받고 싶을 때 나는 잠수를 말한다. 그 시도를 이어가고 싶어 바다 노동을 자처한다. 시도는 늘 서툴고, 거칠고, 어긋나고, 유치하다. 그럼에도 일단은 시도에 닻을 내려본다. 도달이나 성취가 아니라, 시도에. 그래서 내겐 신기록을 갈아치우는 딥(deep) 다이빙의 세계보다 초심자들을 가르치기가 더 짜릿한가 보다. 다이버들이 바다에서 보낸 빈 시간의 반짝임을 알아버렸을 때가 너무도 좋다. '이래서 하는 거였구나?' 윙크.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바다에 관한 온갖 낭만에 한껏 취하는 내게 질문을 던진다.
빈 시간은, 빈 시간과 바다를 엮는 삶은 특권일까.
학살의 바다를 외면한다면, 그럴 수 있다. 폭력의 바다 앞에 등 돌린다면, 침략의 바다에 무지할 수 있다면.
나는 살면서 적지 않은 시간을 소위 '환경 문제'와 연결된 채 살아왔다. 특히 한국에서는 더 그러기가 쉬웠다. 언어라는 특권과 시민권자라는 힘, 교육과 문화 자본을 가지고 있어서 어디에 어떤 '활동'이 있는지 알아내고 참여하기가 쉬웠다. 환경 문제의 변화를 이끄는 비영리단체에서 유급이나 무급으로 노동하는 시기도 있었고, 마음 맞는 주변인끼리 공부 모임이나 작은 행동을 꾸리기도 했다. 윤리적 소비 생활을 고민하기도 하고, 해양 생태에 관해 안내하는 활동, 해양 쓰레기를 정화하거나 조사, 기록하는 활동, '생태적 삶'에 대해 고민하는 커뮤니티 활동, 생활 터전이 파괴된 이들의 저항에 연대하는 활동... 제주를 떠나기 전까지도 삶의 다양한 면면들이 소위 '녹색계'라고도 불리는 '환경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행동하는 이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한국 밖에서 할 수 있는 행동에 한계가 있다고 변명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까미긴에서는 여러 활동을 기획할 수 있었다. 산호초 대화 자리, 다이버들과 해양 정화, 현지인에게 무료 다이빙 교육 같은. 캄보디아에선 망그로브를 심고 관리하는 일.
그 시간들 중 어떤 것도 '수료증'이나 메달처럼 걸어두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런 활동들로 내 몫을 다했다고 안도하고픈 마음도 없다. 다만 그 연결들도 내 삶의 일부였다. 그 모든 활동이 결국은 바다를 향한 사랑의 마음에 가 닿는다. 비록 개별의 활동들이 흩어지고, 깨어지고, 지나가고, 엎어지고, 끝나고, 쫓겨나고, 변질되고 불온할지라도. 여전히 그 연결들 속에서 사랑을 찾아나갈 수 있다면 무의미하지 않았다. 때론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폭력이 깃들기도 한다. 애석하게도. 그럼에도 우리는 시도한다.
계속하는 사랑의 시도가 순도 100%의 무해한 사랑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러기엔 나는 너무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다. 이동할 수 있는 여권과 국적을 가진 특권, 다이빙을 수련할 몸을 가진 특권. 돌봄 노동을 고용할 수 있는 특권. 제2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특권, 글을 쓸 수 있는 특권, 인간으로 태어난 특권... 이것들이 운 좋은 소수의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임을 안다면 특권을 갖지 못한 이들 앞에 떳떳할 수 없다. 가지고 있는 특권을 망각하면 권력을 남용하기 쉬워진다. 특권 개념은 내가 주체적이고 개인적인 능력/노력만으로 이루어진 '영웅'이라는 신화를 깨어준다. 나는 불평등한 사회에 태어났고, 내가 누리는 많은 아름다움은 타자의 착취에 빚지고 있다. 그 불평등은 단순한 해결책으로 말끔히 지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 같은 개인들이 평생에 걸쳐 알아차리고, 이의제기하고, 저항하고 행동한다 해도 끝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떳떳하지 않다. 나는 난잡하다. 욕망과 희생, 정의심과 게으름, 쾌락과 용기가 모두 혼재되어 있는 것이 나의 바다 곁의 삶이다.
바닷속에 있지 않은 시간에 코바늘을 뜨기 시작했다. 바다 여정을 떠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였다. 손가락과 막대기, 실만 있으면 어디서나 할 수 있다. 인터넷이 있으면 몇 가지 패턴을 금방 익힐 수 있다. 몇 가지 패턴만 가지고도 완성할 수 있는 무료 도안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언젠가부턴 도안 없이 만들기도 한다. 수료증 필요 없다고 했는데, 이건 좀 자랑하고 싶다. 코바늘로 뜬 무언가를 손에 쥐었을 때의 만족은 꽤나 순수하다.
처음 뜬 모티프는 수세미로도, 컵받침으로도 쓸 만한 크기. 내 삶을 친절과 돌봄으로 채워 준 인연들에게 선물했다. 처음 머문 숙소 주인 갈린, 두 번째 숙소 관리인 마리멜과 정원사 피터. 까미긴에서는 늘 가던 밥집 삼춘, 다이빙 버디. 비행기 환승으로 하루를 머문 라로통가에서 우연히 만나 집으로 초대해 주고 잘 곳을 내어준 옥스에게 주려고 새벽에 일어나 후다닥 만든 적도 있다. 진심으로 그 사람이 행복하길 바라는 염원을 담아 만들려 애썼다. 이건 예술작품도 아니고, 소비도 생산도 노동도, 감히 폭력도 아니라고 믿고 싶다. '빈 시간'을 그저 한 땀 한 땀 눈에 보이게 표현한 만다라(mandala)에 가깝다.
특권을 알아차리기.
계속해서 빈 시간을 붙드는 수행.
바다를 난잡하게 사랑.
또 다른 특권 발견하기.
빈 시간을 엮고 또 늘이기.
바다를 누림.
특권을 다룰 수 있는 도구 찾기.
빈 시간을 걷기, 회복하기.
바다를 누리는 방법을 전파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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