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노병이 쏘아 올린 작은 공
'취업'이라는 것을 하기로 마음먹은 스물일곱부터 내 인생은 마라톤의 연속이었다. 노력을 조금 했든 많이 했든 아니면 하는 척만 했든 언제나 내 모든 신경의 촉수는 잡힐 듯 말듯한 그 목표를 향하고 있었다. 스물여덟, 스물아홉, 서른.. 목표를 이루는 데에 시간은 꽤 오래 걸렸지만 "나는 멋진 XX가 될 거야"라는 희망사항을 달고 살았기에 행복했다.
졸업하고도 2년 2개월 만에 '취업'이라는 목표를 이루고 나선 업무에 적응하느라 꽤 바쁘게 지냈다. 회사 생활을 하다가 회의감을 느껴 창업을 시작한 사람들의 에세이를 읽은 적 있는데 그들의 재직기간은 짧게는 10개월, 길게는 2~3년이었다. 그들은 과연 그 짧은 기간 동안 회사를 다니며 어떤 큰 깨달음을 얻었을까? 내게 그 기간은 회사라는 시스템을 정확히 알 수도 없을 정도로 쏜살같이 지나갔다.
5년쯤 허겁지겁 달려오다 보니 나 자신이 흐리멍덩하여졌다. 목표는 없고 그날 그날의 일을 처리하기에 바빴다. 점심시간 구내식당의 메뉴에 일희일비하거나 회사 근처의 핫플레이스를 찾아다니는 일을 낙으로 여길뿐이다. 순간 레이스의 시작점에 놓고 온 무언가가 갑작스럽게 생각났다. 내가 그토록 열정을 가지면서 목표로 했던 꿈, 그건 다 어디에 있지?
2018년 MBC 신입 공채에 응시했다. 서른여섯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지만 자기소개서 한 자 한 자에 연륜과 감성을 담아 키보드를 꾹꾹 눌러썼다. 경력단절 여성이 다시 사회에 나가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분명히 몇 년 전에는 익숙한 일이었는데 지원서를 쓰고 수험표를 뽑고 수성사인펜과 수정테이프를 찾는 행동까지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건국대학교 캠퍼스를 가득 메운 수천 명의 인파, 열 살 가까이 어린 친구들이 태반이겠지만 그들끼리 서로 웃고 떠들고 답을 맞혀보는 모습에서 예전 우리들의 모습이 비쳤다.
사실 취업하고 2년 동안은 스터디를 했다. '꿈'이라는 목표를 놓지 않고 바쁜 주말에도 시간을 내서 항상 글을 한 편씩 쓰는 '의식'같은 시간이었다. 장소는 신촌의 엘피스. 이미 예전에 한 번 스터디를 했었던 W와 내가 함께 언론고시 카페에 글을 올려서 모집했는데, 영상을 전공한 K,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많은 E, 아직 대학생 티를 벗지 못한 막내 O 등이 멤버였다. 항상 스터디가 끝나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토요일 점심을 함께 먹었고, 때론 식사 자리에서 시사 이슈에 대한 토론이 이어지며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2014년 여름엔 특별한 커리어를 위해 <KBS 시청자참여>에 다큐멘터리를 내보자고 합심해 충정로의 식당, 연세대 중앙도서관, 안산의 삼겹살집 등에서 로케이션을 하며 영상을 촬영했지만 그 후 편집을 하지 못해 싱겁게 끝나버렸다. 2015년 초, 다들 기대했던 공중파 방송국 공채에서 전원 서류 탈락을 하며 잠정적 해체를 했다. 연애에 지친 연인이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며 헤어지듯, 그렇게 우린 각자의 길을 걸었다.
다시 2018년. 시험장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K와 마주쳤다. 스터디가 끝난 후 3년 만의 마주침이었다. 20대 젊은 수험생들 사이에서 서른여섯, 서른셋의 두 지원자는 서로 하나도 늙지 않았다며 칭찬을 했다. 제작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K는 특정 분야 없이 돈 되는 영상은 다 만들고 있다고 했다. 나는 회사를 잘 다니고 있지만 삶의 모티베이션이 필요해 이곳에 왔다고 언급했다. 부끄러웠다. 그들의 준비와 열정을 알기에 나 역시도 최선을 다해야 이 부끄러움이 사라질 것 같았다. 시험이 끝난 후엔 퇴실하는 사람들 속엔 반가운 얼굴 W도 있었다. 간간히 연락을 주고받던 사이였지만 서로 시험장에서 만나게 될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서른셋의 그녀는 회사를 다니면서도 간간히 공채에 도전해왔고 얼마 전 한 공중파 방송사의 PD 전형 최종까지 올라갔었다고 한다.
이젠 정말 끝이야
W는 다음 달에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지금 있는 회사는 관둔 상태고 콘텐츠 분야에서 일했던 경력을 발판 삼아 커머스 콘텐츠 쪽의 새로운 직장을 찾고 있다고 한다. 작은 불씨라도 조금씩 키워오고 있었지만 이제 영영 끝이 났다는 생각이 들어 순간 찡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 꿈과 현실 사이에서 타협해야 할 시기는 훨씬 더 지났을지도 모른다. 같은 열정으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노를 저었던 것이 가까운 과거인 줄 알았건만...
어쩌면 시험의 작문 주제로 나왔던 "나만 알고 있는 세상의 유일무이한 생각". 그건 아마 어느 늙은 수험생이 아직도 열정을 버리지 못하고 꿈의 근처만 머뭇거린다는 것이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