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업이 "아빠"입니다.

by 바다별


2024년 나는 19년을 근무하던 군에서 전역했다.

제법 인정받는 장교였기 때문에 주변사람들은 모두 의아해했지만 나름 확신을 가지고 내린 결정이었다.



3대1 영상통화 화면. 참 많이도 울었다.

군을 그만 둔 가장 큰 이유는 가족이었다.

코로나 시즌을 지나면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진급을 하고 중책을 맡을수록 장거리 이동이 어려워졌고,

가끔 집에 가더라도 마음 놓고 보낼 수 있는 시간은 토요일 하루가 전부였다.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은 아빠의 필수조건은 아니지만,

나는 가족과 보낼수 있는 시간은 지나치게 부족했다.

게다가 그마저 점점 더 줄어들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잠수함에서 보는 바다. 힘들때 바다보면 더 회의 품는거 알랑가 몰라.

결정적으로 나는 점점 한계에 닿아가고 있었다.

일주일 내내 새벽같이 출근해서 다시 새벽에 퇴근하는 삶을 살면,

사람은 점차 닳게된다.

강철처럼 단단한 줄 알았던 나 자신도 시나브로 깎여나가고 있었다.

2023년 나는 여러번 아팠다.

통풍이 오기도 했고, 세균성 관절염이라며 정밀검사를 받기도 했다.

가족과 떨어진 타지에서 혼자서 끙끙 앓고,

상관에게 깨지고 부하를 혼내면 하루가 갔다.

성과를 위해 독을 품을수록 주변사람들은 점점 더 힘들어했다.

'나는 행복한가? 내 주변의 사람들은 행복한가? 내 가족은?'

잘 해낼수록 물음표가 늘었다.

쓸모 있는 장교로서 가치를 쫓을수록.

나는 내가 쫓던 진짜 소중한 것를 잃어가고 있었다.




결국 나는 군을 떠났다.

아내를 만난지 20년, 아이가 태어난지 7년만에 나는 가족의 곁으로 돌아왔다.

정년 퇴직을 하고서야 함께 살 줄 알았는데 20년이나 앞당긴 것이다.

함께 밥먹고, 함께 잠들고, 아이들의 공부를 봐주는 것.

헤어질 걱정 없이 가족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꿈처럼 달콤한 일이었다.








하지만 촉망받던 장교로서 20년을 보내다가

한 순간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경험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내게 큰 상실감을 남겼다.

전역 후 계획했던 사업이 예상과 달리 흘러가면서 내마음은 더욱 피폐해졌다.

가족을 위해 군을 떠났고,

여전히 인생 최고의 가치가 가족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나의 쓸모를 모두 잃고 가족만 남게 되자

오히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이었는지 혼란스러웠다.

상실감이 커질수록 방황이 깊어지고,

가족을 최우선이라 여기던 내 모습조차 자기기만은 아니었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힘들어하던 순간 가장 힘이 된 존재는 역시나 가족이었다.

갈팡질팡하는 나에게 아내는 한결같이 굳은 믿음과 사랑을 보였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빠가 해군에 가지 않아서 너무 행복해.”라는 아이들의 말은

내가 이 가족의 구성원인 것 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존재임을 알게 해주었다.

내가 제일 단단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내와 아이들의 품에서 나는 여린 싹을 다시 띄울 준비를 할 수 있었다.




TBS 교통방송 라디오 인터뷰

덕분에 나는 가장 나 다운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가족을 사랑하고, 쓰는 것을 좋아하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런 대가 없이 10년간 써온 블로그가 나의 정체성이었다.

아이들이 태어나는 이야기를 엮어 책을 내고, 그 책을 기반으로 강연을 준비했다.

짤막하지만 교통방송 라디오 인터뷰에 출연하기도 하고, 지방 가족센터에서 강연 섭외도 받았다.

내가 가장 나 자신으로 남을 수 있는 일을 찾은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나의 장래희망은 "좋은 아빠"였다.

담임선생님은 나를 불러 그건 장래희망이 아니라고 했다.

"좋은 아빠"는 직업이 될 수 없는걸까?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나는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길을 만들어보려 한다.


나는 본업이 "아빠"인 채로 살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