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성동구 금호동3가 골목냉면
조선 세종 27년(1445년), 훈민정음으로 쓴 최초의 책이 출간되니 바로 용비어천가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움직이니 꽃 좋고 열매가 많다"라는 우리에게 친숙한 이 구절은 너무나도 당연한 자연의 이치를 노래하는 듯 하나 실은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穆祖)에서 태종(太宗)에 이르는 왕가(王家)의 시조, 여섯 대의 행적을 노래한 서사시이다.
조선시대 통치 이념은 유교이고, 유교적 공동체의 실질적인 토대는 결국 가족 공동체이며, 가족 공동체의 뿌리는 선조로부터 현재까지의 혈통 가계도인 <족보>에 근거한 가문이다. 족보는 가족 구성원들간 소속감과 안정감을 갖게 해 주고 문중의 집단 의지는 본인 삶의 가치 기준을 세워준다. 그러기에 “족보는 곧 그 집안의 역사이자 정체성”이기도 하다.
거창하게 <뿌리와 족보>라는 화두로 글을 시작하였는데, 이 거창한 내용을 음식에 접목시켜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메뉴가 있으니 바로 <냉면>이다. 냉면은 내가 아는 한 지역별 특성이 뚜렷하게 차이 나면서도 계보가 존재하는 <족보있는 음식>이다.
면과 육수에 사용하는 재료에 따라 함흥, 평양, 해주, 진주 등 지역별로 구분되고, 의정부파와 장충동파라는 양대산맥으로 계보가 나뉜다.
그런데 여기 어느 카테고리에도 끼지 못 했으나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재래시장에서 수십 년째 터줏대감으로 사랑받고 있는 노포 냉면집이 있으니 성동구 금호동 금남시장에서 1966년 개업하여 3대째 이어내려 오는 <골목냉면>이다.
아직 외식산업이 태동하기 전인 1960년대 개업한 식당들은 대부분 상호랄 것이 없었다. 특별한 레시피가 있어 장사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전쟁 후 없는 살림 통에 먹고살기 위해 장사에 나서다 보니 상호도, 간판도 변변했을 리 없다.
그 당시 식당의 상호는 단골들이 주인장의 고향이나 외모, 식당 위치 등 단순하면서도 단편적인 특징 하나를 잡아 편하게 부르곤 했는데, 이 식당은 금남시장 골목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보니 상호명이 자연스레 <골목냉면>이 되었다.
비근한 사례로 부산 영도의 노포 곱창집 상호가 <서울집>인 것은 부산으로 피란 온 주인장 고향이 서울이어서이고, 종로 시계 골목에서 성업했던 <곰보냉면>은 창업주의 얼굴에 곰보자국이 있어 단골들이 부르던 이름이 그대로 상호가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집의 냉면은 진주냉면처럼 황태, 멸치, 새우, 다시마 등 해물로 육수를 낸다. 하지만 1960년대라면 진주냉면의 맥이 끊겨있던 시기인 데다 소고기, 닭고기, 꿩고기를 사용하는 평양식도 아니었으며, 냉면에 매콤새콤한 빨간 비빔양념이 들어가니 오히려 <서울식 냉면>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재래시장의 냉면이라 가격이 저렴할 뿐 저렴하게 만들진 않는 것이 시장 노포 냉면의 공통점이다. 가게 벽면 한편에는 한국의 전통연인 <방패연>에 골목냉면의 정신을 빗대어 해석하신 내용이 있는데, 주인장의 장인 정신과 이 집 냉면의 가치를 엿볼 수 있다.
대표 메뉴인 비빔냉면은 고운 고춧가루와 참깨, 오이와 절임무 등의 고명이 잔뜩 올라가 있다. 물냉면 역시 참깨가 수북이 올라가 있는 것은 매한가지인데 해물로 빚어낸 육수의 감칠맛이 참 좋다. 보통 냉면은 절제된 여백의 맛을 즐기는 음식이라 평하지만, 이 집의 냉면은 참깨와 고명이 절제는커녕 좀 과하다 싶은데 이는 오히려 전쟁 후 물자가 귀했던 그 시절 무조건 많이 얹어주는 것이 미덕이었던 시대상이 반영된 레시피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해석함이 맞을 듯하다. 실제 재래시장 오랜 업력의 노포 냉면집인 동아, 깃대봉, 할머니, 곰보냉면 등 한결같이 참깨의 사용이 과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직접 빚는 만두도 평균 이상을 훨씬 상회하는 맛을 낸다. 김치만두라고는 하는데 신김치만 잔뜩 들어간 수수한 시장 만두가 아니라 나름 고기 배합 비율이 괜찮은 편인지라 투박하더라도 한 접시 더 먹고 싶은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