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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오찬 Apr 23. 2024

Since 1967, 충주 관아골 노포 '아서원'

충청도는 중원문화권의 중심 고을인 충주와 청주의 앞글자를 따서 이름 지어졌다. 한강 물길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충주가 충청도에서 가장 큰 고을로 인구규모나 지정학적 측면에서 가장 중요했더랬다.

충주 관아공원으로 변모한 충청감영 전경

그리하여 조선시대 충주에는 종 2품의 관찰사가 상주하는 충청감영이 소재하였는데, 20세기만 하더라도 이 관아를 중심으로 충주의 도시 기능이 작동하였다.


「아서원」이라는 중식당이 개업했던 1967년만 하더라도 가장 화려하고 번성했던 관아골 골목은 도시의 확장 과정 속에서 쇠락한 구도심이 되어버렸다.


충주 「아서원」의 개업은 1967년이지만, 식당의 연원은 1907년 서울 명동에서 개업한 4층 규모의 호화 청요릿집인 동명(同名)의 아서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근대 사회까지만 하더라도 열린 공간에서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광장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던 한반도에서 의외로 회합과 결의의 장소로 빈번하게 사용되었던 공간이 바로 '당시 화교가 운영했던 대형 중화요릿집'이다.

서울 명동의 아서원 전경(좌측 하단의 도안은 조선공산당 마크)

1919년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13도 대표가 모여 선포문과 결의 사항을 낭독했던 「봉춘관」, 1919년 1월 경성 시내 전문학교 학생 대표의 독립 비밀 결사 모임이 열렸던 「대관원」이 바로 그런 사례이고, 서울 명동의 「아서원」 역시 1920년 임시정부 주도 하에 조선 총독과 일본의 고관대작을 암살하려는 광복 결사대의   비밀 회합이 열렸었고, 1925년에는 조선 공산당 창당 대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현재 아서원 전경과 창업 당시 식당 전경 사진

충주 「아서원」의 창업주는 이런 역사적인 서울 아서원의 주방에서 일을 하다 내려와 충주에 터를 잡았는데, 올해로 벌써 56년의 업력을 자랑하는 충주 1세대 중식당이다.


8살 정도였던가?

어느 날 저녁 아버지께서 갑작스레 외식을 제안하셨고 40여 년 전만 해도 차가 귀한 시절이니 125cc 오토바이에 나는 아빠 앞자리에, 어머니는 동생을 업고 뒤에 앉아 시내로 나와 처음 먹었던 음식이 바로 '탕수육'이다.


그리고 그 중식당이 바로 「아서원」이고..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국민학생 꼬맹이에게 외식은 흔치 않은 경험이었던 데다 짜장면만 해도 감지덕지였는데, 탕수육이라니..


당시 내 기억을 더듬어보면 찌개도, 국도 아닌 점성이 있는 허여멀건한 소스에 튀김옷을 입은 정체불명의 음식이 빠져 있으니 그 낯선 음식과의 조우에 젓가락을  감히 대지 못 하다가 어머니의 성화에 한 입 맛보는 순간 극락을 경험했던 것 같다.

아서원의 옛날 탕수육

사람은 나름대로 학습 메커니즘을 갖고 있는데, 어떤 행동이 좋은 감정과 결부되어 있다면 본능적으로 그 이후에도 그 행동을 추구하기 마련인데, 당시 탕수육에 대한 첫 경험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난 지천명(知天命)이 다가오는 나이에도 여전히 추억의 탕수육을 찾아 전국을 다니고 있다.


식당이 세월을 먹으며 내려온 시간 동안 탕수육 레시피는 온고지신(溫故知新)하였는지 튀김옷 다량의 기포가 바삭한 식감을 주는 비교적 최신 조리 방식이다. 다만 단 맛보다는 새콤한 맛의 투명한 소스는 그 옛날 내 기억 속 그대로인 것이 참으로 반갑다.

옛날 방식으로 웤질하여 내어준 아서원의 간짜장

간짜장 역시 주문 후 바로 야채와 춘장을 볶아주는 방식이다.

간혹 일부 중식당에서 전분을 넣고 끓여낸 짜장 소스를 베이스로 양파와 양배추 등 야채만 새로 볶아 주는 '반(半)짜장'을 내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 집은 정통 방식 그대로 기름에 튀겨낸 춘장을 새로 볶아주는 데다 단 맛의 캐러멜 소스와 인공 감미료가 잔뜩 가미된 '한국식 짜장'이 아닌 '화상 노포 스타일의 짜장'인지라 추억의 방문이 더욱 가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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