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오찬 May 13. 2024

Since 1948, 시간을 기록하는 3대 대물림 노포

서울 동대문구 휘경로 「영화장」

2015년 방영된 삼대천왕을 필두로 냉장고를 부탁해, 맛있는 녀석들, 한식대첩, 전현무계획 등 음식과 요리, 식당이라는 화두가 예능 프로그램의 주된 키워드로 등극하며 덩달아 '밥장사'에 대한 대중의 인식 역시 크게 바뀌었다.


전국 방방곡곡에 숨은 맛집을 찾아 소개했던 SBS 요리 버라이어티 쇼, 「백종원의 삼대천왕」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고된 일 중 하나가 바로 밥장사이다. 새벽부터 주방에 나가 식재료를 다듬고, 음식 만들고 설거지 하다가 음식물 쓰레기 처리하고를 반복하다 보면 넋이 나가버리곤 한다.

뿐이랴? 홀에서 주문받고 안내하고 서빙하다가 와중에 진상 손님이라도 만나는 날이면 그야말로 삶에 대한 회의감까지 들기 마련이다.


거기에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지방 중소도시에 남아 있었던 유교적 관념 속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회적 계급에 대한 귀천 역시 「밥장사 = 고된 육체 노동 + 참기 힘든 감정 노동」이라는 등식을 성립케 했다.


우리네 인식 속에 「밥장사」란 큰돈을 벌기 힘든 육체노동이었으니 당연히 자식에게 대물림하지 않고, 본인 대에서 업장을 접으려 했던 것도 이 땅에 노포가 드문 이유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박찬일 쉐프와 그의 저서인 「노포의 장사법」


현재 우리가 즐기고 있는 노포 열풍은 글 쓰는 요리사, 박찬일 셰프의 「노포의 장사법」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래된 가게를 고포(古鋪)라 하지 않고, 노포(老鋪)라 부르기 시작한 것도 '오래되어 낡은' 것이 아니라 '세월을 머금고 무르익었기'때문이라는 그의 철학을 사회가 받아들여서라고 생각한다.


무언가의 가치가 후대로 전해지기 위해선 활자로 고정되어야 하는데, 그 이전에는 밥장사가 글로 기록될 만큼 대단하다는 인식이 아예 없었던 데다 특히 오래된 식당은 변치 않는 맛과 문화의 정수가 아닌 불친절하고 낡은 공간에 불과했으니 대중은 노포의 가치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더랬다.


영화장 전경과 입구 벽면에 기록된 영화장의 역사

한국외대 역 이문동에 자리 잡은 터줏대감이자 3대 대물림 화상 노포의 한쪽 벽면에는 자랑스러운 「영화장」의 역사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영화장」의 역사는 1948년 중국 사천 출신의 정수지 여사(1대)가 한반도로 건너와 충남 부여에 개업한 「복흥루」로부터 시작된다. 정여사의 아들인 유지곤 사장(2대)은 복흥루를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와 이문동에 자리 잡고 1970년 지금의 영화장을 열었고, 2003년 손자 유영승 사장(3대)으로 대물림하여 올해 76년째 성업 중이다.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기록할만한 가치가 있다'라는 의미와 진배없고, 그 기록이 전시되어 있다는 것은 '후손이 그 역사를 자랑스러워한다'라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연대별로 정리된 영화장의 발자취와 기록들

모든 것이 다 그러하듯 일부 극소수만 알고 있던 지식이 수평적으로 널리 확산되고, 다음 세대로 건네지기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기록」이다.


결구배추(호배추)가 들어간 탕수육과 삼선백짬뽕

이 집의 음식 역시 식당의 역사만큼이나 대단하다.  「영화장」은 '서울 3대 탕수육 맛집'으로 알려져 있는데, 옛날 탕수육답게 단 맛보다는 신 맛이 강조된 하얀색 소스에, 튀김옷에 기포층이 많아 부먹임에도 불구하고 그 바삭함이 식사 말미까지 유지되었다.


영화장의 수제 군만두

화상 노포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수제 군만두 역시 대단하다. 허름한 백반집도 김치만큼은 직접 담근 것을 내주듯 화상 노포는 차라리 만두 메뉴를 빼버리는 한이 있어도 기성품 만두는 내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군만두와 중국냉면 등 모든 음식이 다 훌륭했지만, 내 마음이 가장 동한 것은 삼선백짬뽕이다.

요리라는 것이 재료 없이는 만들 수 없는지라 한국의 화상 요리 이면에는 화농(華農 : 농업에 종사하는 화교)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당시 한국에는 없는 채소들의 씨앗을 중국에서 가져와 경작했다.


(左) 화농이 중국에서 들여온 속이 꽉찬 결구배추와 (右) 속이 차지 않은 토종배추


주요 경작물은 피망과 우엉, 양배추, 토마토와 당근 등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채소가 바로 결구배추(현재 우리네 김장 배추, 중국에서 들여왔다 하여 호(胡)배추라고도 한다)이다.

노포 중식당에 가면 탕수육 소스와 짬뽕 등에 배추를 재료로 사용한 경우를 왕왕 볼 수 있는데 국내 들어온 청요리 초창기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집의 삼선백짬뽕은 단 맛을 내는 배추의 흰 줄기 부분과 감칠맛을 내는 굴, 오징어가 듬뿍 들어가 깊은 맛을 이끌어낸다.



                    

매거진의 이전글 Since 2000, 달인 여장부가 끓여낸 폐가짬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