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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 석빙고 이야기

남쪽 고을에도 얼음은 필요하지

by 정영현

'빙고(氷庫)'는 말 그대로 얼음을 보관하는 창고입니다. 빙고에 대한 최초의 사료는 6세기 초 신라 지증왕 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후 주로 궁궐에서 필요로 하는 얼음을 보관하기 위해 건설했지만, 조선시대가 되면 지방 관아에서도 빙고를 설치했습니다.


빙고는 왜 필요했을까요? 얼음은 식품을 오래 보관하거나 시원한 음식을 만드는 등 다양한 용도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전근대에는 냉동고가 없었기 때문에 얼음을 얼리거나 보관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온도 변화가 적도록 땅에 구덩이를 파고 지하에 보관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본적인 빙고의 원리입니다. 보통 음력 12월이 지나 강이 얼면 얼음을 채취하여 빙고에 보관하고, 춘분이 지나서야 빙고에 있는 얼음을 꺼내 썼습니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따르면, 한양의 빙고에서는 강의 얼음 두께가 4치(약 12cm)는 되어야 채취한다고 합니다. 구조를 나무로 지었는지, 돌로 지었는지에 따라 목빙고(木氷庫)와 석빙고(石氷庫)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경주 석빙고

조선시대 동래부 관아에도 빙고가 있었습니다. 이웃한 작은 고을인 기장현에도 빙고가 있었다고 하니 도호부 급으로 큰 고을인 동래에는 당연히 빙고가 있어야 하겠지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동래부의 빙고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고, 석빙고가 그려진 지도를 몇 번이나 보고도 그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래를 근거로 활동하고 있는 한 선배가 빙고에 대해 물었고, 저는 확답을 못한 채 '사료가 있는지 찾아보겠다'라고 해놓고는 다시 잊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도시사 연구자인 다른 선배가 『낙민동 유적』(두류문화연구원, 2020) 발굴 보고서에 '수혈식 주거(움집)의 용도는 빙고로 보인다'라는 내용이 있다는 사실을 저에게 알려 주셨고, 저는 그때부터 동래 빙고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지리지나 고지도 등을 찾아보니 과연 '석빙고'라는 명칭과 위치가 나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740년에 나온 『동래부지』 창고 항목에는 동래부의 석빙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乙未 府使 李重協建 在甑山下.
을미년에 부사 이중협이 지었고 증산 아래에 있다.


동래부사 이중협(李重協, 1681~?)은 영조 임금이 즉위한 해인 1725년 7월부터 이듬해인 1726년 12월까지 재임했습니다. 거기 비추어 보면 위 자료에 나온 '을미년'이라는 연도는 오류입니다. 이중협의 재임 기간은 1725~1726년인데, 이 무렵에 해당하는 '을미년'은 1715년이니 이중협이 부임하기 10년 전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 나오는 '을미년'은 아마 이중협이 부임했던 해인 1725년 '을사년'의 오류로 보입니다.

*올해가 2025년이니 빙고 건립 300주년이네요. 추가로 기입합니다.


조선시대 고을 수령의 임기는 규정 상 60개월(약 5년)인데, 실제로는 평균 2년을 채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계산해 보면 이중협도 동래부에 1년 반 정도를 머문 셈입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그는 수토병[*水土病: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 생기는 병)에 걸려 공무를 수행하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이중협은 동헌의 핵심 건물인 충신당에 남긴 시에서도 본인의 질병에 대해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는 그 짧은 임기 동안 천마산 석성 봉수대를 구봉산으로 옮겼으며, 현재 복원되어 있는 동래부 동헌의 부속건물인 찬주헌(수령을 보좌하러 부임한 막료들의 숙소)을 중건했습니다. 그리고 관청에서 사용할 얼음을 보관하기 위한 석빙고도 지었던 겁니다. 참고로 현존하는 지방 석빙고 대부분은 영조 때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이중협이 석빙고를 지었다는 곳인 '증산(甑山) 아래'는 어디일까요? 같은 『동래부지』 산천 항목을 보면 '증산'에 대해 '동래부 동쪽 2리에 있으며 임진왜란 때 왜인이 성을 쌓고 수비했는데, 지금은 반이나 허물어졌다. 위에는 장대(將臺)가 있으며 아래에 성황사(城隍祠)가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증산은 충렬사 뒷산인 망월산으로, 동장대가 있고 동래왜성 터도 그곳에 있습니다.


조금 더 그 위치를 명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지도를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침 『동래부지』가 지어진 지 10년 남짓 지나 그려진 「해동지도」에 석빙고가 그려져 있습니다. 석빙고가 건립된 이후 지도가 제작된 시기까지 40년 정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도 속 석빙고를 이중협이 지은 것으로 보는 것은 큰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


「해동지도」에 표시된 동래부 주변과 석빙고

이 지도에 따르면 관아 동쪽으로 향교를 지나 충렬사를 쪽으로 가는 길에서 갈라지는 북쪽으로 난 길 근처에 석빙고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눈대중으로 보면 향교와 성황사 사이 정도가 됩니다.


지금은 동래향교가 명륜초등학교 옆에 있지만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 지도가 그려지기 몇 년 전인 1744년 무렵부터 한동안 향교는 현재의 동래고등학교 뒤쪽에 있었습니다. 성황사는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으나 동장대 아래, 현재 군관청을 옮겨지어 놓은 곳 언저리가 되지 않을까 추측해 봅니다. 그렇다면 석빙고의 위치는 현재 전등사라는 사찰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혹시나 발굴해 보면 돌로 된 부재가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그 위치를 현대의 지도에 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대 지도에 표시한 석빙고의 추정 위치('다음 지도'를 바탕으로 편집)

주변의 지형을 보면 빙고가 읍성의 서쪽이나 남쪽이 아니라 동쪽에 있는 이유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서쪽에 낙동강이 흐르지만 너무 먼데다 중간에 험난한 만덕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남쪽에는 온천천이 흐르지만 수량이 많지 않아 충분히 두꺼운 얼음을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동쪽에 있는 수영강이 얼었을 때, 동천교 부근(지금의 원동)에 가서 얼음을 채취해서 운반해 오는 쪽이 가장 편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읍성에서 수영강으로 가는 길목에 석빙고를 설치하여 운반된 얼음을 보관했던 겁니다. 물론 요새는 날씨가 따뜻해서 여간해서는 수영강에 빙판이 생기는 일이 없지요.


그렇다면 낙민동 유적에서 빙고로 추정된다는 수혈식 건물터는 무엇일까요? 그 유적지에는 현재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데, 위치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1725년에 이중협이 지었다는 석빙고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다른 사례가 있다는 점, 또 위치가 수영강변으로 가는 방면이라는 점에서 빙고일 가능성을 아주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 건물터가 빙고라면, 원래 낙민동 유적 위치에 목빙고가 있었다가 1725년에 이중협이 석빙고로 옮겨 지은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덧붙이자면, 1899년에 편찬된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에도 창고 항목에 석빙고가 나오고, 요역에 매 결당 5장씩 빙정(氷丁)이 배당되어 있습니다. 이걸로 봐서 19세기까지는 석빙고가 운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힘듭니다.


석빙고4.JPEG 동래 석빙고 추정 위치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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