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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도 관우 사당이 있었다

동래 관왕묘 이야기

by 정영현

『삼국지(연의)』를 읽어보지 않으신 분도 '관우(關羽)'라는 이름은 알고 계실 겁니다. 그는 장비(張飛)와 함께 초창기부터 유비(劉備)를 도와 세력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유비가 촉(蜀) 땅에 들어가 조조·손권과 함께 '천하삼분(天下三分)'을 이루었을 때, 그 중앙에 위치한 형주를 지키다 계략에 걸려 손권의 포로가 되었고, 절개를 지키다 죽음을 맞게 됩니다.


전승에 따르면 관우는 9척의 키에 대추빛 얼굴, 누에 같은 눈썹에 봉황의 눈, 긴 수염을 휘날리는 위엄 있는 외모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적토마에 올라 청룡언월도를 비껴 들고 있는 모습은 용맹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역사책 『춘추』를 애독하는 문무를 겸비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의 사후, 구전을 통해 전설적인 일화들이 덧붙게 됩니다. 예를 들어 데운 술이 식기 전에 적장 화웅의 목을 베고 돌아왔다거나, 잠시 의탁했던 조조의 곁을 떠날 때 받은 선물을 돌려줬다거나, 유비를 만나기 위해 관문을 막아서던 장수 여섯의 목을 베었다거나, 은혜를 갚기 위해 화용도에서 조조를 놓아줬다거나, 마취를 거부하고 팔의 뼈를 깎아내는 수술을 맨 정신으로 받으며 바둑을 두었다거나… 이런 이야기들은 연극으로 만들어져 대중의 감탄을 자아냅니다.


이런 식으로 중국 민간에서 관우는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점차 신격화되어 곳곳에 관우 신을 모시는 사당이 만들어집니다. 관우는 전장의 무운(武運)을 비는 무신(武神) 일뿐 아니라, 상인들이 장삿길의 안전과 성공을 기원하는 재물신(財物神)으로 숭배하기도 하였습니다.

타이완 가오슝의 관제묘

관우를 숭상한 것은 민간뿐만이 아니라 군주들도 마찬가지였죠. 군주 입장에서야 관우를 칭송함으로써 신하들에게 그의 충의를 본받도록 하는 의도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결국 군주조차 팬이 될 정도로 관우라는 인물에게 큰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군주가 관우에게 '팬질'을 하게 되면서 그의 시호도 점차 승격되어 갑니다. 촉한을 건국한 유비가 죽은 후 후계자 유선은 유비에게 소열황제(昭烈皇帝)라는 시호를 올리면서 관우에게는 '장무후(壯繆侯)'라는 시호를 내립니다. 그러다 송나라 때가 되면 '무안왕(武安王)' 등 왕급의 시호로 추존됩니다. 명나라 말의 만력제 때는 '관성대제(關聖大帝)'라고 하여 드디어 황제급으로 추존됩니다. 그에 따라 관우를 모시는 사당의 명칭도 자연히 '관왕묘(關王廟)'에서 '관제묘(關帝廟)'로 승격되었겠지요.




조선에서 처음으로 관우의 사당이 세워진 시기는 임진왜란에 이어지는 정유재란 무렵으로, 1598년 명에서 파견한 유격장군(遊擊將軍) 진인(陳寅)의 요청으로 한양에 관왕묘가 지어집니다. 그리고 명나라의 경리(經理) 만세덕(萬世德)의 요청으로 1601년에 한양에 또 하나의 관왕묘가 지어집니다. 이후 전자는 남관왕묘, 후자는 동관왕묘라고 불리게 됩니다. 알려져 있듯이 서울의 '동묘'는 동관왕묘를 줄여서 부르는 말입니다.


서울의 동관왕묘(동묘)

비슷한 무렵 지방에도 관왕묘가 세워지는데, 전라도의 강진 고금도(1598, 진린의 요청)와 남원(1599, 유정의 요청), 경상도의 성주(1598, 모국기의 요청)와 안동(1598, 설호신의 요청) 등지입니다. 이 시기 만들어진 관왕묘는 대개 중국 관왕묘(혹은 관제묘)의 형식을 빌어 관우 상을 모시고 좌우로 그 권속인 관평, 주창의 상을 세우는 형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17세기의 군담소설 『임진록』에는 '명나라의 황제 신종(만력제)의 꿈에 관우가 조선을 도우라고 부탁을 하여 원군 파병을 결심했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근거가 없는 소설 속 이야기지만, 만력제가 관우를 숭상하여 1578년 '관성대제'로 추존한 것은 사실입니다. 또 1601년 동묘가 들어섰을 때에 친필 현판과 건립 비용을 하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만력제 이후 관우 사당이 들어섰음에도 관우의 사당을 '관제묘'가 아니라 '관왕묘'로 불렸습니다. 이것은 아마 조선의 군주가 '왕'이기 때문에 관우를 그보다 높은 '황제' 격으로 모실 수는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고종실록』 1902년 1월 27일 기록을 보면 조정의 논의로 '관왕'을 '관제'로 승격시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종은 한양에 북묘와 서묘를 추가로 건립할 정도로 관우를 숭상했는데,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황제국이 되었으니 관우를 왕으로 묶어둘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조선 후기, 대략 19세기 무렵이 되면 민간에서도 관우 신앙이 유행했던 것 같습니다. 민간에서 사당을 세워 관우신을 모셨는데, 서울의 성제묘를 비롯하여 전국에 많은 사당이 들어서게 됩니다. 동래의 관왕묘도 원래 이와 같은 민간 신앙에서 출발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시기 조선의 민간에서 관우 신앙이 유행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단 이 무렵 국내외 상황이 어수선해지면서 복을 빌고 재액을 물리치는 기복벽사 신앙이 유행하게 된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겁니다. 특히 무속에서는 관우와 같이 원통한 죽음을 맞은 장군신이 영험하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한국 인물의 경우 최영, 남이, 이순신, 임경업 등의 인물이 장군신으로 널리 모셔지는 것도 같은 이유이지요. 한편으로 임진왜란 때 관우의 도움으로 일본을 물리쳤다는 생각에서,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위협에 맞서고자 하는 의식의 표현으로 보기도 합니다. 혹은 19세기 유교 질서가 무너지고 천주교가 탄압받는 상황에서 사상적 공백을 채우는 한 방식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동래에 관왕묘가 세워진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입니다. 그 건립에 대한 기록으로 동래기영회에서 소장 중인 문서가 몇 점 남아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손숙경 선생님의 2003년 연구가 있어서 이 글을 쓰는 데 많이 참고하였습니다.


다음은 관왕묘의 유래에 대한 기록을 정리한 것인데, 처음에는 동래가 아니라 부산진 지역에 관우 신을 모시는 풍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1834년 동래의 박경채(朴璟采)라는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꿈에 관왕(=관우)이 나타나 영정을 모시라는 계시를 내렸다. 그래서 부산진의 관왕 사당을 찾아보았더니, 김인득(金仁得)이라는 사람이 영정을 모시고 있었다. 박경채가 김인득에 꿈 얘기를 하니, 김인득도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하였다. 박경채는 김인득이 모시던 관우 영정을 받아와 자기 집에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


김인득 이전에도 부산진 지역에서는 관우를 모시는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민간에서 모시던 것으로 공식적인 관왕묘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동래 지역의 지리지나 고지도 등을 찾아보면 각종 제단이 나오지만 관왕묘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부산진의 관우 신앙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19세기부터 시작했을 수도 있고, 혹은 임진왜란 직후까지 거슬러 올라갔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임진왜란 직후에 시작된 것이라면, 그 시작은 앞에 언급한 명나라 장수 만세덕이 개인적으로 신앙하던 것이 정착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만세덕은 이미 한양에 동관왕묘를 세우도록 요청한 전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는 1599~1600년 부산진에 주둔했고, 1602년 조선에서 사망한 이후 부산진에 만공단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아마 그가 부산진에 있을 무렵에도 관우 신앙을 이어나갔다면, 어딘가 제단을 마련했을 겁니다.


만약 만세덕의 관우 신앙이 민간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가정하면, 이렇게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만세덕이 관우 제단을 세우고, 그의 사후 그 제단을 개편하여 만공단을 만들고, 원래 제단에 있던 관우 영정은 민간에서 (부산진 무관들이) 모시게 되었다는 겁니다. 자성대 내의 최영장군 비석에 대한 제사도, 어쩌면 1834년에 관우 제사가 동래로 넘어간 이후 그 자리에 비슷한 성격의 장군신 최영을 모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비석을 새긴 연대라도 확인하면 좋겠지만 제당을 함부로 열어볼 수는 없겠지요. 부산광역시에서 편찬한 『부산의 금석문』에도 이 비석은 실려 있지 않습니다.




동래에 관왕묘가 들어서기까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이어집니다.


박경채가 죽자 그가 죽자 아들 박우형(朴遇衡)이 관우 제사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개인의 재원으로는 제사를 올릴 비용을 대기가 점점 힘들어졌고, 박우형은 1874년 동래부에서 사우(祠宇: 사당 건물)를 마련하여 영정을 봉안하고 제수(祭需: 제사에 지낼 물품) 경비를 대도록 요청했다. 동래부사 박제관(朴齊寬)은 관왕에 대한 제사를 민가에서 받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관왕묘를 건립하고 춘추로 제사를 올리도록 했다. 1875년에 부사 황정연(黃正淵)에 의해 관왕묘 건물이 정비되었다. 그다음 해인 1876년에는 부사 홍우창(洪祐昌)에 의해 위토(位土: 제사 비용을 대기 위한 토지)가 조성되었다. 이후 동래부 소속의 무관과 서리들을 중심으로 관왕묘에 대한 제사와 관리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동래에 관왕묘가 조성된 이후인 1899년에 만들어진 『동래부읍지』의 단묘(壇廟) 항목을 찾아보니, '관왕묘'는 수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관청에서 건립에 보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완전히 공적인 제단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동래 사회 일각에서는 동래 관왕묘를 국가 제사로 승격시키고자 애를 썼으나, 실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래 관왕묘 터(명륜동 447번지)에 들어선 상가 건물

이후 관왕묘는 일제강점기까지 제사를 이어왔으나, 1950년대에 건물이 허물어지고 맙니다. 관우 영정은 동래 기영회에서 보관하다가 다시 동래경로당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제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동래경로당이 이전하면서 관우 제사의 전통은 끊어졌고, 관우 영정도 개인 소장자에게 넘어가고 말았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2020년 김형근 선생님의 연구를 참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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