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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회복한 일상을 지키는 것

영화 〈퍼펙트 데이즈〉(2024) 감상문

by 정영현


이 영화는 작년 여름에 영화의 전당에서 봤는데, 이제야 감상을 쓰고 있습니다.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안 보신 분들은 이 글을 보기 전에 얼른 영화부터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반년이 넘은 지금 되새김질해도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독일 감독인 빔 벤더스가 감독한 일본 영화입니다. 저는 벤더스 감독의 영화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2015)만 봤고, 일본 영화는 종종 보는 편입니다. 제가 느끼기에 이 영화는 감독의 국적과는 별개로 그간 봐온 일본 영화 감성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혹은 어떻게 보면, 이 영화에 일본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전 세계 어디든 크게 다르지 않은 '도시의 감성'을 다루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 일본 도쿄의 화장실 개선 프로젝트 'The Tokyo Toilet'의 일환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스토리는 이 프로젝트와 전혀 무관하고, 주인공이 직업상 이 프로젝트로 만들어진 화장실을 순례하며 청소하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사실 더러운 공중화장실이었으면 주인공의 일상이 상당히 구질구질하게 느껴졌을 것 같은데, 멋진 디자인과 최신 시설의 깨끗한 화장실에서 일하니 전문직 같은 느낌을 주는 면이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영화를 봤을 때, 애니메이션 〈엘리멘탈〉(2023)을 감명 깊게 본 직후라 그런지 주인공이 주변과 거리감을 유지하는 모습이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직장 후배나, 가족들이나, 흠모하는 술집 안주인 모두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모습은 상처를 받기 싫어서 그런 걸까. 저런 반복되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조심해서 사는구나. 어쩌면 이것은 일본이나 독일이 공유하는 정서일까.


그리고 마지막에 주인공의 미묘한 표정은 뭘 말하는 걸까. 종종 한국 영화에서 '울면서 웃는 장면'을 넣어서 관객의 감정을 짜내기도 하던데, 이것도 일종의 '신파'일까. 괜찮은 영화라는 느낌은 받았지만, 그때는 깊이 공감을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고 한 달 정도 뒤였던가, 저랑 친한 철학 전공자 김 선생님과 이 영화에 대해 말할 기회가 있었는데, 정말 좋은 영화였다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아무래도 두 사람의 감상 포인트가 달랐는지 대화의 핀트가 어긋난 느낌이었습니다. 저도 제가 느낀 바를 이리저리 말씀드려 봤는데 김 선생님은 갸우뚱해하시는 느낌이셨고, 김 선생님은 그날 행사로 바쁘셔서 구체적인 감상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지난 2월에 수술을 받고 난 직후, 당뇨 문제였는지 회복 징후가 좋지 않아서 다시 입원을 해야 했습니다. 며칠이지만 호되게 고생을 했습니다.


퇴원한 후에도 이전 같은 일상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몇 주에 걸쳐 제 몸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가장 적합한 생활 패턴을 찾아내고, 그것을 지켜가야 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어느 정도 새로운 일상에 적응했지만, 그 과정에서 (제 삶에서 아주 중요하게 여겨왔던 것을 포함한)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평소에는 관성에 맡기기만 해도 삶의 항상성이 유지될 수 있지만, 한 번 무너진 일상을 다시 쌓아 올리는 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심지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하는지…




〈퍼펙트 데이즈〉에서 주인공의 사생활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도 어떤 사건으로 '일상'이 크게 무너진 경험이 있었던 것은 동생이 나오는 장면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각고의 노력과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겨우 '일상'이라는 열매는 키워낼 수 있었을 겁니다. 소박한 맛이 나는 그 열매를 내일 또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야 말로 그의 행복인 겁니다.


그런 그에게 더 큰 행복(내지는 쾌락)을 줄 수 있는 기회들이 찾아옵니다.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는 젊은 아가씨, 모처럼 만에 찾아온 가족, 그리고 어쩌면 찾아올지도 모르는 사랑. 하지만 그에게 그런 기회는 겨우 되찾은 일상을 뒤흔들 것이 분명한 것들입니다. 주인공은 그런 불안 요소들을 모두 포기하는 보상으로 평온한 일상을 보장받습니다. 대광명을 만끽하기보다는 나뭇잎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볕뉘[木漏れ日]'에 만족하기로 합니다. 요새 말로 하자면 도파민을 포기하고 세로토닌을 선택한 셈...


하지만 그도 사람이기에, 마음 한 구석에 아쉬움이 남을 겁니다. 저 길을 택했다면 더 큰 행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주인공이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준 웃는 것 같으면서도 우는 것 같은 표정은, 안도감과 아쉬움의 소용돌이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것은 저의 얼굴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의 얼굴이기도 합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그동안 저에게 '일상'은 '탈출해야 하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제 직업 특성상 정해진 일과를 반복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간혹 여행을 하는 이유도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고 일상을 벗어난 경험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그간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2017)를 인생 영화로 들곤 했는데, 주인공이 (반강제긴 하지만) 일상을 탈출해서 겪는 모험을 보고 대리만족을 얻었던 것이죠.


그런데 제 친구들 중에는 그 영화에 그다지 공감을 못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대개 '왜 굳이 일상을 포기하고 모험을 선택하느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문득 그 친구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어떤 감상을 말할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네요. 〈퍼펙트 데이즈〉는 그 친구들의 인생 영화가 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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