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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의 신선들(1)

김겸효와 소하가 놀던 곳

by 정영현

부산은 예전에 '동래(東萊)'라고 불리었는데, 이것은 신라 경덕왕 때 전국의 지명을 중국화 하면서 '거칠산군'에서 '동래군'으로 바꾼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산둥반도의 동쪽 지역을 '동래'라고 불렀고, 그 너머 발해만에는 '봉래산'·'방장산'·'영주산'이 있어 그곳에 신선이 산다고 하였습니다. '동래군'의 명칭은 일단 거기서 따온 것입니다.


이후 어느샌가 '봉래'는 '동래'를 이르는 별칭이 되었습니다. '봉래산이 있는 고장'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래서인지, 중세 시기 동래는 신선이 사는 고장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조선시대에는 동래부 관아에서 사신을 맞이하는 건물인 객사(客舍) 이름이 '봉래관(蓬萊館)'이었을 정도였습니다. 현재까지도 부산에는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과 영주산이 있고, 신선대나 강선대를 비롯하여 신선과 관련된 수많은 지명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선에 얽힌 지명만 전하는 것이 아니고, 동래에는 머물렀던 신선의 이름도 여럿 전합니다. 문헌에 따르면, 동래 지역을 다녀갔다는 신선으로 중국 진나라에서 불로초를 찾으러 온 서복(徐福/徐市)과 신라 말기의 문인 최치원(崔致遠)이 있고, 동래에 살았다는 신선으로 김겸효(金謙孝)와 소하(蘇嘏)가 있습니다.


먼저 이번 글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뒤의 두 신선, '김겸효'와 '소하'를 소개해볼까 합니다.




지금은 부산 사람 중에도 '김겸효'와 '소하'라는 두 신선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조선시대까지는 꽤 알려져 있는 인물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옛날 동래에는 이 두 신선으로부터 이름을 딴 '겸효대(謙孝臺)'와 '소하정(蘇蝦亭)'이라는 명승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겸효대(謙孝臺)
현의 남쪽 5리에 있다. 선인(仙人) 김겸효(金謙孝)가 놀던 곳이라 해서 지은 이름이다.

소하정(蘇嘏亭)
소하가 항상 흰 사슴을 타고 금구선인(金龜仙人)과 놀았다 해서 속칭 '소하정'이라 하였는데, 작은 새들은 깃들지 못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3 경상도 동래현 고적 조

요컨대 겸효대는 신선 김겸효가 놀았던 곳이고, 소하정은 소하가 흰 사슴을 타고 금구(금빛 거북) 선인과 놀았던 곳이라는 겁니다. 아쉽게도 이 두 신선의 행적에 대해서는, 다른 문헌을 뒤져보아도 여기 나오는 정도가 다입니다.


1740년 동래부에서 편찬한 지방지인 『동래부지』를 보면, 역시나 그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똑같은 내용 뿐입니다. 다만 겸효대가 있는 현재의 배산에 대해 '척산(尺山)'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곳 중 하나로 겸효대를 들고 있습니다. 당시 동래 지역에서 김겸효를 어떤 성격의 신선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기우제를 올리는 대상은 용신이거나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인물인 경우가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지도를 보면, 겸효대와 소하정이 그려져 있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겸효소하(해동지도).jpg 해동지도(18세기 중엽)
겸효소하(1871영남읍지).jpg 『영남읍지』(1871) 지도
겸효소하(1895영남읍지).jpg 『영남읍지』(1895) 지도
겸효소하(다음지도).jpg 겸효대와 소하정 추정 위치(다음지도)

위 지도를 통해 보면, 우선 겸효대는 배산 북동쪽 산록에 위치합니다. 현재의 부산외국어고등학교나 경상대학교 위치 정도일까 싶습니다. 혹은 배산성지와도 관련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예컨대 김겸효라는 인물이 배산성지에 있는 건물 터에 살았거나, 혹은 옛날 사람들이 배산성지에 있는 건물 터를 보고 김겸효라는 신선이 살던 곳이라고 상상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배산북쪽1.JPEG 겸효대가 있었던 배산 북쪽 산록을 온천천에서 본 사진
배산북쪽3.JPEG 충렬사 근처에서 본 배산

소하정은 지금은 복개된 온천천의 지류인 소정천 유역으로,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장전 2동에 해당합니다. '소정천'이라는 이름 자체가 '소하정 곁을 흐르는 냇물'이라서 붙은 이름입니다. 소정천 유역에는 '비석바위'라고 하여 '금정산성부설비'라는 비석이 세워진 큰 바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위에 '백록동천(白鹿洞天)'이라고 적혀 있어서 소하가 하얀 사슴을 타고 다녔다는 전설을 떠올리게 합니다.


소하정1.JPEG 장전2동 비석바위
소하정2.JPEG 비석 바위에 새겨진 '백록동천(白鹿洞天)' 글자(사진 우측)

덧붙이자면, 21세기가 되어 소정천은 복개되고, 부산대학교 하숙촌이 있던 그 주변에는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가 개발되었습니다. 하지만 비석바위는 다행히 파괴되거나 이전되지 않고 그 자리에 살아남아, GS아파트와 벽산아파트 사이에 있는 '비석바위 공원'의 주인장으로 지금도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김겸효와 소하에 대해 현전하는 기록은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중 가장 이른 것은 고중지(高中址)라는 인물이 경상도 안찰사로 부임하는 최함일(崔咸一)에게 지어준 다음 시입니다.


고중지, 「바위산이 천목산과 같구나(巖巒似天目)」
소박한 다리는 너른 호수에 눌러 있고 / 野橋壓平湖
작은 정자는 끊어진 산기슭에 기대 있네 / 小亭依斷麓
옛날의 그 소하 신선이 / 云昔蘇嘏倦
흰 사슴을 타고 와서 놀았다더니 / 來遊騎白鹿
- 『신중동국여지승람』 권23 경상도 동래현 제영) 중에서

고중지의 활동 연대를 직접 알기는 힘들지만 안찰사 최함일이 1290년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이 시는 14세기 초에 지어진 것이 아닐까 합니다. 여기에 '작은 정자'가 나오는 걸로 봐서 이 시기에는 소하정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중지의 생애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어서 그가 동래의 소하를 어떻게 알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다음은 고려 말의 문인인 정포(鄭誧, 1309~1345)와 정추(鄭樞, 1333~1382) 부자가 남긴 시입니다. 정포는 지난번 글에서 다룬 '해운대에서 도망친 선비 최해'의 제자인데, 울산에 유배되었을 때 동래를 방문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아들 정추는 관직생활을 하다 1366년 동래현령으로 좌천되는데, 그때 자기 아버지가 방문했던 곳을 둘러보았던 것 같습니다.


정포, 「동래잡시(東萊雜詩)」
소하는 지금에 어디로 갔나 / 蘇嘏知何往
동쪽 벼랑에 옛터가 아직 있는데 / 東崖有故居
듣자 하니 흰 사슴을 탔다고 하고 / 如聞騎白鹿
본성이 벼슬을 싫어했다네 / 本自陋金魚
유적은 천 년 뒤에 남아 있지만 / 遺迹千年後
덧없는 삶은 한바탕 꿈일 뿐 / 浮生一夢餘
우연히 왔다가 감개가 많아 / 偶來多感慨
가려고 하다 다시 머뭇거리네 / 欲去更躊躇
- 『동문선』 권9
정추, 「동래의 옛적을 생각하다(東萊懷古)」
겸효는 연꽃과 같이 깨끗하니 / 謙孝濯濯似蓮花
가슴으로 세상의 기를 삼켜 노을 위로 솟구치네 / 胸呑八荒氣凌霞
고개를 돌려 만호의 고을을 부러워하랴 / 回頭肯羡萬戶邑
훨훨 날아 신선의 집을 왕래하거늘 / 翩翩來往神仙家
소하 선생 지금 어디에 있는가 / 蘇嘏先生今底所
뜰 앞의 늙은 나무와 새는 말이 없네 / 庭前老木鳥無語
금구선인 하얀 사슴 모두 보이지 않고 / 金龜白鹿都不見
바위의 꽃은 피고 지건만 동산엔 주인이 없네 / 巖花開落園無主
-『원재선생문고』 권상 시

고중지와 정포가 지은 시는 소하정에 대한 것 전하지만, 정추는 겸효대와 소하정 모두 노래하고 있습니다. 고려 말 기준으로도 이 두 인물은 오래전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그들이 머물렀다는 장소에 문인들이 방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김겸효와 소하 두 사람은 어느 시대 인물일까요? 조선 후기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이 지은 『해동이적』이라는 책은 한국의 신선 혹은 기이한 행적을 남긴 38인을 다루고 있는데, 그 인물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참고로 이 책은 이후 황윤석에 의해 증보되어 수록 인물 수가 100여 명에 이르게 됩니다)


단군(檀君)ㆍ혁거세(赫居世)ㆍ동명왕(東明王)ㆍ화랑도의 사선(四仙)ㆍ옥보고(玉寶高)ㆍ김겸효(金謙孝)와 소하(蘇嘏)의 이선(二仙), 대세(大世)ㆍ구칠(仇漆)ㆍ감시(旵始)ㆍ김가기(金可記)ㆍ최치원(崔致遠)ㆍ강감찬(姜邯贊)ㆍ권진인(權眞人)ㆍ김시습(金時習)ㆍ홍유손(洪裕孫)ㆍ정붕(鄭鵬)ㆍ정수곤(丁壽崑)ㆍ정희량(鄭希良)ㆍ남추(南趎)ㆍ지리선인(智異仙人)ㆍ서경덕(徐敬德)ㆍ정염(鄭磏)ㆍ전우치(田禹治)ㆍ윤군평(尹君平)ㆍ한라선인(漢挐仙人)ㆍ남사고(南師古)ㆍ박지화(朴枝華)ㆍ이지함(李之菡)ㆍ한계노승(寒溪老僧)ㆍ유형진(柳亨進)ㆍ장한웅(張漢雄)ㆍ남해선인(南海仙人)ㆍ장생(蔣生)ㆍ곽재우(郭再祐)

낯선 인물들 사이에서 알 만한 이름도 더러 눈에 띕니다. 아무튼 이 중 '두 명의 신선(二仙)'이라고 하여 김겸효와 소하가 나옵니다. 『해동이적』 책을 뒤져 보니 두 사람의 행적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온 것과 같으므로 따로 언급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만, 그들이 '신라 사람'이라는 기록이 덧붙어 있습니다.


『해동이적』은 전기 형태의 야사집이라 그 내용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어쨌건 이 책이 이들의 활동 시기를 언급한 유일한 기록이므로, (삼국시대인지 통일신라인지는 몰라도) 신라의 인물로 보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다음은 조선 전기의 유명한 문신 신숙주가 쓴 「동래현성문루기」의 일부입니다.


신숙주, 「동래현성문루기(東萊縣城門樓記)」
하물며 최고운(崔孤雲)ㆍ김겸효(金謙孝)ㆍ이소하(李蘇嘏) 등의 현인들이 일찍이 놀던 곳으로, 신선의 자취가 아직도 완연한데 어찌 옛날을 추모하고 느끼며 흥을 부칠 만한 누와 집이 없어서 명승지의 구역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 『보한재집』 권14 기

이 글은 신숙주가 새로 지은 동래현 읍성 문루에 '정원루(靖遠樓)'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지은 글입니다. 이 누각이 세워진 시기는 1446년이므로, 이 시도 거의 같은 시기에 지어졌을 겁니다.


보시다시피 이 글에서 신숙주는 동래를 대표하는 신선으로 최치원과 김겸효, 소하 세 사람을 들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다른 자료에는 소하의 성을 따로 언급하지 않거나 그대로 '소(蘇)' 씨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 글에서만 유독 소하의 이름에 '이(李)'라는 성을 붙여 '이소하'라고 부르고 있다는 겁니다. 과연 소하는 이씨일까요? 이 글을 인용한 것 외에는 다른 사례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겸효대와 소하정에 대한 시가 많이 남아 있는데, 대개 중앙에서 부임한 관리들이 읊은 것입니다. 그 대부분은 현재의 부산시장에 해당하는 동래부사(東萊府使)들이고, 한 사람만 왜관에 파견된 접위관(接慰官)입니다. 아마 동래 지방에 부임하면서 고을 이곳저곳을 시찰하는 중에 명승지인 겸효대나 소하정에 방문한 감상을 시로 남기거나 했을 겁니다.


시 내용은 대개 흔적만 남은 겸효대와 소하정의 쓸쓸한 풍경을 보며 옛 선인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들 머릿속에 있는 동래의 이미지는 '먼 남쪽 변방에 있는 선경(仙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신선처럼 살고 싶다'라는 식으로 마무리되는 시도 있는데, 신선처럼 고결하고 청빈한 삶을 살겠다는 뜻이겠지만, 업무 스트레스가 많아서 탈출하고 싶다는 속내가 드러난 건 아닐까요?


이 시들을 연대순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찾지 못해서 빠진 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시는 대체로 제가 번역했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사족처럼 해설을 달아두었습니다. 내용이 상당히 긴 관계로 대충 넘겨 보셔도 무방합니다.(그렇다고 '뒤로 가기' 하지 마시고 '라이킷♡'은 챙겨 주시길)


윤훤(尹暄, 1605년 동래부사), 「내주잡영(萊州雜詠)」
겸효대
연꽃은 깨끗하여 맑은 물에서 자라니 / 蓮花濯濯出淸水
천고의 이 사람은 그와 닮았구나 / 千古斯人相似之
겸효는 이미 흰 구름을 타고 떠났는데 / 謙孝已乘白雲去
세간에서는 헛되이 정추의 시만 보누나 / 世間空見鄭樞詩

소하정
소하정은 지금 어느 곳인가 / 蘇嘏亭今何處是
금구선인 흰 사슴 모두 황당하구나 / 金龜白鹿摠荒唐
신선은 비록 본래 종적이 없다 하나 / 神仙雖本無蹤跡
속세에 전하지 않으니 도리어 상심하네 / 俚俗不傳還可傷
- 『동래부지』(1740) 제영잡저

임진왜란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부임한 동래부사 윤훤의 「내주잡영(萊州雜詠)」 중에서 겸효대에 대한 부분입니다. 고중지와 정포는 소하정에 대해서만 시를 남겼으므로 겸효대에 대해서는 정추의 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윤훤은 유명한 윤두수(尹斗壽)의 아들입니다.


이춘원(李春元, 1607년 동래부사) 「'내주잡영'에 차운하다(次萊州雜詠)」
겸효대
손에 부용을 쥔 것과 형상이 비슷하고 / 手把芙蓉形與似
너울거리는 금절은 아득히 어디 갔는가 / 翩然金節杳何之
응당 푸른 바다의 용궁 속에서 / 應從碧海龍宮裏
한가로이 지상의 칠언시를 읊을 것이네 / 閑誦黃庭七字詩

소하정
들리는 소리로 신선은 장수불사한다는데 / 聞說神仙長不死
흥망은 세월을 지나 한(韓)이 당(唐)이 되었네 / 興亡歷歷漢爲唐
사람과 성곽이 지금 이러한데 / 人民城郭今如此
외로운 두루미가 돌아오니 또 스스로 상심하네 / 孤鶴歸來亦自傷
- 『구원선생집』 권1 시

윤훤의 후임자인 동래부사 이춘원은 윤훤의 시를 차운(次韻)하여 시를 지었습니다. '차운'했다는 것은 각운(한시에서 2행과 4행의 끝 글자의 발음을 맞추어 운율을 만드는 것)을 따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시면 윤훤의 시와 이춘원의 시는 각 절의 2행과 4행이 '之'·'詩', '唐'·'傷'으로 동일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요즘 힙합 랩으로 치면 원곡의 '라임'을 따와서 '리스펙'을 보이는 기법입니다.


황여일(黃汝一, 1615년 동래부사), 「백거이가 항주에 대해 쓴 것을 흉내 내다(效樂天記事抗州)」
동남의 아름다운 고을 봉래인데 / 東南佳麗是蓬萊
4년간 수령 노릇을 하자니 재능이 없어 부끄럽네 / 四載黃堂愧不才
영도의 말은 진짜 주인을 가려서 나고 / 影島馬應眞主出
소하대의 사슴은 늙은 신선을 위해서 오네 / 蘇臺鹿爲老仙來
외로운 충신의 저항하는 절개는 산천에 장대하고 / 孤忠抗節山河壯
겸효가 기강을 붙드니 우주에 펼쳐지네 / 謙孝扶綱宇宙開
따로 해운대로 향하니 절경임을 알겠고 / 別向海雲知絶勝
만 그루 단풍이 여러 층 누대를 감싸네 / 萬株紅綠擁層臺。
- 『해월선생문집』 권3 시

백거이(白居易, 772~846)는 중국 당나라의 시인인데, '백낙천(白樂天)'이라고 호를 붙여 부르는 것이 더 유명합니다. 백거이가 항주에 부임해서 쓴 시를 본받아서 동래부사 황여일도 위의 시를 남긴 것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리스펙'이자 '스웨그'겠지요. 조선시대 수령의 임기는 거의 5년에 해당하는 60개월이었지만, 평균 2년도 못되어 교체되었습니다. 그러니 황여일이 햇수로 4년을 재임한 것은 제법 오래 머문 셈입니다.


이원진(李元鎭, 1644년 동래부사)
소하정
소하 선인의 자취는 얼마나 오래되었나 / 蘇嘏仙蹤問幾秋
나무엔 둥지 튼 새가 없고 물은 헛되이 흐르네 / 樹無巢鳥水空流
푸른 벼랑 흰 사슴을 빌려올 수 있다면 / 淸崖白鹿如能借
바다 위 천 개의 봉우리 일일이 놀러 다닐 텐데 / 海上千峯一一遊
- 『동래부지』(1740) 제영잡저

이원진 본인도 신선이 되어 흰 사슴을 타고 동래의 선경을 유람하고 싶다는 감상인 것 같습니다.


홍위(洪葳, 1657 동래부사)
겸효대
신선의 수레(風馭)는 세월이 흘러도 돌아오지 않고 / 風馭千秋去不回
지금 남은 흔적은 다만 황량한 누대뿐이네 / 至今遺跡但荒臺
봉래산은 이렇게 멀지만 원래 서로 가까웠으니 / 蓬山此去元相近
요동의 학(遼鶴)은 때때로 노니며 오가네 / 遼鶴時時倘往來

소하정
흰 사슴 금구선인 어디로 갔나 / 白鹿金龜何處歸
십주삼도(十洲三島)는 서로 따르리라 / 十洲三島定相隨
봄이 왔는데 바위에 꽃이 만발한 것만 보이고 / 春來只見巖花發
산 아래 남은 터에는 곳곳에 의문이네 / 山下遺基處處疑
- 『청계선생집』 권2 시

홍위의 시는 제가 찾은 것 중에 겸효대를 노래한 마지막 시입니다. 이후에는 주로 소하대에 대한 시만 나옵니다. 그 이후 산사태 같은 걸로 황폐해져서 겸효대가 옛 명승의 모습을 잃을 건 아닐지요?


신정(申晸, 1670년 접위관), 「내산감고(萊山感古)」
소하정
주민들이 옛 정자 터를 가리기건만 / 居民指點舊亭基
흐르는 물과 푸른 산 곳곳에 의문이네 / 流水靑山處處疑
사슴을 탄 천계의 사람은 이미 멀어지고 / 騎鹿九天人已遠
세간에는 헛되이 정추의 시만 남았구나 / 世間空有鄭樞詩

신정은 동래부사가 아니고 접위관(接慰官)으로 파견된 인물입니다. '접위관'은 일본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파견되는 관리입니다.


'왜관(倭館)'은 일본 상인들이 머무르며 조선 상인과 통상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해 준 무역장인데, 일본에 가까운 동래부에 있었습니다. 1670년 당시 왜관은 지금의 수정동에 있었는데, 일본인들은 그곳이 좁고 불편하다고 하여 왜관을 이전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신정은 그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접위관으로 동래 왜관에 파견되어 소하정에 대한 시를 남겼던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이때 왜관 이전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우여곡절 끝에 1673년에야 왜관 이전이 결정되어 1678년에 더 남쪽의 넓은 터로 이전하는데, 이른바 '초량왜관'입니다. 그 이전에 있던 왜관이 있던 지역을 '구관(舊館)' 혹은 '고관(古館)'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원래 있던 왜관 터에는 기장현에 있던 '두모포(豆毛浦)'라는 수군 기지가 이전해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옛 왜관을 '두모포왜관'이라고 통칭합니다. 그러므로 신정이 접위관으로 방문했던 왜관도 초량왜관이 아니고 두모포왜관입니다.


소두산(蘇斗山, 1683년 동래부사),「소하정에 올라(登蘇嘏亭)」
하얀 사슴은 이미 자취가 없고 / 白鹿已無跡
쓸쓸한 정자의 이름만이 전하네 / 孤亭名獨傳
여기 올라오니 서로 시대는 다르지만 / 登臨各異代
앞뒤의 두 소씨는 신선구나 / 前後兩蘇仙
소두산, 『월주집』 권1 시

소두산은 소하와 자신이 모두 소(蘇)씨라는 점에 착안하여, 두 명의 소씨가 신선이라고 동화시키고 있습니다.


정현덕(鄭顯德, 1867년 동래부사), 「봉래별곡(蓬萊別曲)」
소하정 들어가니 처사는 간 곳 업고
유선대(遊仙臺) 올라가니 도사는 어데 간고?


고종 초, 흥선대원군이 섭정하던 시기의 동래부사 정현덕이 쓴 「봉래별곡(蓬萊別曲)」은 한글 필사본으로 남아 있습니다. 소하에 대해 '처사(處士)'라고 표현한 걸로 보아, 소하에게는 '은거한 선비'라는 이미지가 있었나 봅니다. '유선대(遊仙臺)'는 '강선대(降仙臺)'를 말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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