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렇게 렇게 만만하니? 하!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귀엽다'라는 단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형용사」 예쁘고 곱거나 또는 애교가 있어서 사랑스럽다.
이렇게 보면 아무리 봐도 좋은 뜻인데, 가끔 보면 '귀엽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로 주변으로부터 '귀엽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 사람들이지요. 또 '귀엽다'는 말은 보통 손아랫사람이나 동물, 무생물 등에 사용하지만, 간혹 교수님이나 선배 등 손윗사람에게 '귀엽다'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걸 보면 아무래도 '귀엽다'라는 말 속에는 위 사전의 정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은데요.
자, 우리가 언어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보고 '귀엽다'는 말을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사전의 정의에서는 '예쁘고 곱다'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우리는 단순히 '예쁘고 고운' 것, 예를 들어 '예쁜 장미꽃'이나 '고운 노을'을 보고 귀엽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도 느끼시겠지만, 사물이나 동물에 대해 '귀엽다'라고 하는 경우는 '크기가 작다'는 뜻을 함께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귀엽다'라고 하는 경우는 어떨까요? 위와 마찬가지로 작은 사람, 즉 어린이나 체구가 작은 경우 '귀엽다'는 말을 듣는 경우가 많고, 혹은 동글동글하게 생기거나 동안인 경우에도 '귀엽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이것은 '귀여움'을 느끼게 되는 외양적인 조건입니다.
혹은 사전에는 '애교가 있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람의 행동거지가 귀여운 경우입니다. 또 일부러 애교를 부리지 않더라도, 좀 어리숙하거나 나이에 비해 천진난만하게 행동하는 사람에게서 '귀엽다'는 인상을 받곤 합니다.
손윗사람이라도 평소 어리숙하게 군다면 '귀엽다'는 소리를 하게 됩니다. 혹은 (나를 성가시게 하지 않는 선에서) 우스꽝스러운 실수를 한다던가. 또 용의주도하지 못하고 속내가 다 드러나거나, 뻔뻔하지 못하고 감정이 다 비치거나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손윗사람에게 '귀엽다'라고 하는 경우는 경우는 살짝 비꼬는 느낌이 있기 때문에 주로 뒤에서 '저 선배 귀엽다', 이런 소리를 하곤 하지요. 손윗사람 면전에서 대놓고 '귀엽다'라고 하는 건 진짜 친한 사이가 아니고서는 힘들 겁니다.
이런 어감들을 종합해 보건대, 실생활에서 '귀엽다'가 가지는 속뜻은 '무해하다(해를 끼치지 못한다), 약하다, 불쌍하다, 만만하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그 대상이 나한테 해코지를 못할 것이다', 이런 느낌을 받을 때 우리는 '귀엽다'라고 하는 겁니다.
예컨대 외적인 측면에서 보아 아기처럼 '귀여운' 얼굴을 하거나 크기(덩치)가 작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대상이 나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허당이거나 어린애처럼 굴 때에도 그들을 '만만하게' 느끼면서 '귀엽다'라고 말합니다. 손윗사람도 마찬가지이고요.
애교를 부리는 것도 따져 보면 '어린아이의 행동을 흉내 내는' 등으로 '나는 약한 존재', '나는 무해한 존재'임을 알리는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귀여움'을 얻으려는 것이지요.
보통 사람들은 이런 '귀여운' 존재를 마주치게 되면 나도 그에게 해를 끼치기 싫어지고, 나아가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까지 들게 됩니다. 물론 약함을 드러낼수록 더 괴롭히고 싶어 하는 사람도 종종 있는데, 그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소시오패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귀엽다'는 소리를 듣는 입장에서도 다양한 대응 방식을 보여주는데요. 물론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경우도 많겠습니다만, 그건 넘어가고.
'귀엽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사람의 경우, 앞서 말한 '약하다, 불쌍하다, 만만하다'는 뉘앙스를 본능적으로 느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본인이 좀 세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귀엽다'는 소릴 들으면 손사래를 칩니다. 손윗사람한테 대놓고 '귀엽다'라고 하지 못하는 것도 '만만하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약자'로서 보호받을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기 '귀여움'을 어필하는 부류도 있습니다. 연예인들이 동안을 유지하려 하고 카메라 앞에서 애교를 부리는 게 대표적인 '귀여움' 어필이고. 일상생활에서도 자기가 '귀여운' 것을 이용해서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게 들통이 나면 '여시(여우)' 소리를 듣게 됩니다. 혹은 '나는 좀 귀여우니까 내가 좀 까불거려도 애교로 넘어가 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도 종종 보입니다.
TMI로, 저는 일단 외양을 보면 절대 귀엽지 않은 편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 중에 저를 '귀엽게' 내지는 '어엿비' 여겨주시는 분들이 많이 계셔서 제법 깝치고 다녔습니다. 그나마 조금 철이 들어서 이렇게 주제 파악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