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송상현의 첩, 이양녀 이야기

일본으로 끌려가서도 절개를 지키다

by 정영현

다른 지역분들은 어떠신지 모르겠지만, 부산 사람이라면 대부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래읍성이 함락되면서 동래도호부사(줄여서 동래부사)였던 송상현(宋象賢)이 왜군과 맞서다 순국한 사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동래부사 송상현


현재 송상현 부사를 추모하는 대표적인 공간으로 안락동의 충렬사(忠烈祠, 동시에 안락서원)가 있고, 또 복천동에 송공단(宋公壇)이라는 제단이 있습니다. 이 제단에는 송상현을 비롯한 관리들과 유생, 여성, 노비 등 동래성 전투에서 순국한 사람들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요. 여성의 경우 이름이 남아 있는 사람은 송상현 부사의 첩 금섬(金蟾) 뿐입니다.




송공단의 여성 추모비 구역. 기왓장을 던지며 왜군에 맞선 두 의녀(義女)에 이어 송상현을 따라 죽은 금섬, 그리고 동래읍성 전투 때 목숨을 잃는 이름없는 여성들을 추모하고 있다.


금섬은 함흥 출신의 기녀로 1591년 '13세에' 송상현의 첩이 되어 이 해 동래부사가 된 송상현을 따라 동래로 오게 되었습니다. 40이 넘은 송상현이 이렇게 어린 첩을 들인 것에 대해 송씨 문중에서는 '송상현이 물에 뛰어든 금섬이를 구해주고 거두었다'라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금섬은 종종 '김섬'으로 표기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金'을 성으로 이해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을 '한금섬(韓金蟾)'이라고 쓴 기록이 보이므로, 성은 '한'이고 이름이 '금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금섬'은 한자 그대로 풀면 '금두꺼비'인데, '달(月)'의 별칭이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이듬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송상현은 동래성을 지키다 순국하였고, 금섬도 송상현 곁으로 돌아와 포로가 되어 저항 끝에 죽음을 맞게 됩니다. 금섬은 기생, 즉 천민 출신의 첩이었으나 절개를 지키다 죽은 인물로 추앙을 받았고, 비교적 이름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송상현이 동래부사 시절 데리고 있던 첩은 또 한 명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양녀(李良女)'라는 인물입니다. 이 분도 임진왜란을 겪으며 온갖 고생을 했고, 결국 절부(節婦)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아직 금섬에 비해 그 이름이 덜 알려져 있는 것 같아서, 이 기회를 빌어 여러분께 소개해 올립니다.




이양녀는 사료 속에서 종종 '이조이(李召史)'라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조이(召史)'는 여성에게 붙이는 호칭으로, 간혹 한자음 그대로 '소사'라고 읽는 경우도 있습니다.


양첩(良妾) 이조이는 자녀를 데리고 일본에 잡혀 갔다가 그 후 갑오년(1594, 선조 27)에 평행장(平行長)이 경상 우병사 김응서(金應瑞)와 화평을 의논할 때 석방되어 돌아왔다.
- 조경남, 『난중잡록』 권1


같은 첩이라도 천민인 관기 출신이었던 금섬과는 달리 이양녀는 양인 출신이었습니다. 위 기록에 나오는 '양첩(良妾)'이 바로 양인 출신의 첩이라는 뜻입니다. '양녀'는 이름일 수도 있으나, 그냥 양인 여성이라 그렇게 호칭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첩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아 양반 출신은 아닌 듯하고, 아마 중인 혹은 평민(상민) 출신이었을 겁니다.


보통 조선시대에 지방관으로 부임하면 본부인은 본가에 있고, 부임지에서 집안일이나 잠자리 시중을 드는 것은 첩이나 관기들이 도맡았습니다. 송상현의 첩들 중 이양녀는 금섬보다는 나이가 많았을 것이고, 첩으로 거두어진 것도 더 먼저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마 실질적으로 부임지에서 안살림을 도맡은 것은 금섬보다 이양녀 쪽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신흠(申欽, 1566~1628)이 쓴 「송동래전(宋東萊傳)」에 부기된 「이양녀전(李良女傳)」의 전반부는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이양녀(李良女)는 송상현의 첩으로, 송상현을 따라 동래로 왔다. 송상현은 왜적의 포로가 될까 우려하여 이양녀를 서울로 돌려보냈다. 이양녀는 동래를 떠나 하루를 피난하다가, 부산진성이 함락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상심하여 말하기를, "내 차라리 지아비를 위해 죽겠다." 하였다. 결국 동래로 돌아오니, 여종 만개(萬介), 금춘(今春)과 함께 포로가 되어 바다를 건넜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에게 바쳐졌다.
이양녀가 필사적으로 그에 저항하니, 히데요시는 이를 의롭게 여겨 그만두었다. 전(前) 관백(關白)의 딸 미나모토 씨(源氏)와 함께 별원(別院)에 거처하게 하여, 절개를 지키고 돌아올 수 있었다.
- 신흠, 「이양녀전」, 『상촌집』 권31 잡저


송상현이 이양녀에게 (본가가 있는) 서울로 피난할 것을 권했으나, 남편과 죽기 위해 떠난 지 하루 만에 동래로 돌아왔다는 겁니다. 위 『난중잡록』 내용을 보면 이양녀가 자녀와 함께 일본에 잡혀갔다고 했는데, 아마 이때의 피난 역시 아이들을 데리고 몸종 둘과 함께 떠나는 길이었을 겁니다.


'나는 차라리 지아비를 위해 죽겠다'는 부분의 원문은 '吾寧死於所天'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所天'은 '나에게 하늘과 같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보통 남자가 말하면 '군주', 여성이 말하면 '남편'으로 풀이합니다.


피난을 떠났다가 하루 만에 부산진성이 함락되었다고 하는데, 부산진 전투는 임진왜란의 첫 전투입니다. 그렇다면 송상현이 이양녀를 보낸 것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셈입니다. 송상현은 곧 전쟁이 날 것을 며칠 전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요? 동래읍성이 함락된 것은 부산진성이 함락된 이튿날인데, 이마 이양녀 일행이 하루 거리를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면 동래읍성 함락 당일, 즉 송상현과 금섬이 죽은 날 혹은 그 이튿날 정도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왜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금섬처럼 죽음을 택하지 못한 이유는 역시 데리고 온 어린 아이들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이양녀는 자녀 및 두 명의 여종과 함께 포로가 되어 바다 건너 일본에 끌려갔고, 히데요시에게 바쳐졌습니다. 포로가 된 이후 히데요시 앞에 끌려가기 전까지의 과정은 한 세기 후에 지어진 신경(申炅)의 『재조번방지』에 더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용모가 매우 아름답지는 못하나 나이 젊고 정결하여 모든 왜적이 다투어 범하려 하였다. 이양녀가 팔사적으로 항거하니, 혹은 달콤한 말로 꾀고 혹은 칼날로 협박하였으나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여러 우두머리들이 데리고 갔으나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왜인 가운데에 젊고 잘 생긴 자들이 희롱하여 말하였다.
“늙은이만 보았으므로 싫어하여 거절하는 것이다. 만약 나를 본다면 어찌 이렇게 굳게 거절하겠는가. 혹은 은화를 바꾸어 가고 혹은 돈을 빌려서, 의복을 곱게 입고 용모를 꾸며 그 방에 들어가 꾀면, 반드시 욕정이 그 마음을 어지럽힐 것이다."
그러나 그 절개는 금석과 같이 굳었으니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이 사람은 진정한 절부다"라고 하며 다시는 함부로 무례를 범하지 않고 경의로 그를 대했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家康)의 처와 함께 있도록 하고 여러 부녀자들의 스승으로 삼았다.
신경, 『재조번방지』 권1


이 글에서는 (금섬이 미녀로 기록된 것에 비해) 이양녀는 상대적으로 미모가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고 쓰고 있는데, 굳이 이 상황에서 외모 얘기를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하긴 일본 패망 후 GHQ의 종군위안부 보고서에서도 생존자들의 외모에 대한 악평을 늘어놓은 적이 있으니, 글쓴이들이 남자라 그런 걸까요. 이 내용은 지나치게 구체적이라, 사실에 기반하고 있더라도 사람의 입을 거치며 다소 살이 붙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앞의 기록들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이양녀의 절개를 가상하게 여겨 '전(前) 관백(關白)의 딸 미나모토(源) 씨' 혹은 '이에야스(家康)의 처'와 함께 거처하게 했다고 하였습니다. 제 짧은 지식으로는 여기에 공통적으로 해당할 만한 사람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무렵 히데요시는 일종의 인질로 삼기 위해 전국의 지방영주들에게 처자를 상경시키도록 하였습니다. 이양녀는 아마 그들이 모여 있는 곳 근처에서 함께 기거하도록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경섬(慶暹)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10년 정도가 지난 1609년에 일본에 회답겸쇄환사의 일행으로 파견되었다 돌아와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깁니다.


왜인들의 말에 의하면, (중략) 송상현의 첩은 굽히지 않고 수절하여 죽기를 스스로 맹세하니, 왜인들이 귀히 여기고 존경하여 집 한 채를 지어 우리나라의 여자 포로로 하여금 호위하고 시중들게 하였으며, 유정(惟政)의 일행이 오게 되자 절조를 완전히 하고 돌아갔으므로 원근에 떠들썩하게 전파되어 아름다운 일로 일컫는다 했다.
경섬, 『해사록』 권하 7월 17일 정미


여기서는 히데요시가 새로 집을 한 채 지어 이양녀를 중심으로 여성 포로들이 모여 살게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 이양녀는 임진왜란 당시 처음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여성 포로 중 한 명이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뒤이어 끌려온 다른 여성 포로들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 내용을 보면 당시 일본인들도 이양녀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양녀가 절개를 지킨 이야기는 그가 돌아와서 혼자 무용담처럼 꾸며서 한 이야기가 절대 아니라는 거지요.




앞서 인용한 『난중잡록』의 내용을 보면, 이양녀는 1594년 평행장(平行長), 즉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경상우도병절도사 김응서(金應瑞)와 화평을 의논할 때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상당수의 포로들이 전쟁이 끝난 이후, 외교 재개를 논의하면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굉장히 빠른 귀환입니다.


다만 이양녀가 귀환한 이후에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1597년 다시 정유재란이 터졌으니 돌아온 후에도 편안한 생활을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사이 동래는 계속 일본군의 점령지 상태인데다 더 이상 남편도 없으니 이곳으로 돌아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포로에서 풀려난 이양녀는 어디로 돌아갔던 것일까요?


이양녀가 붙들릴 때, 송상현이 준 갓끈을 가지고 떠났는데, 항상 몸에 지니고 떼어 놓지 않았다. 여종 금춘이가 먼저 귀환하니, 이양녀가 갓끈의 구슬 두 알을 가지고 가게 하며 말하기를, "공의 부인이 살아계시면 이것을 보고 믿으시리라"라고 하였다. 이양녀가 돌아와서 부인과 구슬을 맞추어보고, 서로 대성통곡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슬퍼하였다.
신흠, 「이양녀전」, 『상촌집』 권31 잡저


앞에 인용한 「이양녀전」의 뒷내용입니다. 타국에 끌려갔던 첩이 죽은 남편의 갓끈 구슬을 증표로 본처와 감격의 재회를 하는 장면입니다. 이것을 통해 이양녀는 송상현의 본가에 돌아가 의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갓끈. 구슬 두 알을 맞춰 보면 같은 물건인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양녀와 재회했던 송상현의 본처는 누구일까요?


조선중기 생활사를 알려주는 유명한 일기로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와 이문건(李文楗)의 『묵재일기(黙齋日記)』가 있습니다. 이중 이문건의 일기에는 아들이 부실하여 직접 손주들을 키운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그 손녀 중 하나인 이숙녀(1555~1608)가 바로 동래부사 송상현의 본부인이었습니다. 보통 '성주 이씨'라고 부르는데, 할아버지가 쓴 『묵재일기(黙齋日記)』에 그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아마 이렇게 재회한 남편 잃은 두 여성은 서로를 의지하며 남은 여생을 보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양녀의 정확한 생년은 알 수 없으나 본부인보다는 꽤 젊었던 것 같으니, 어쩌면 그보다 좀 더 오래 살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자녀들도 같이 돌아와 이곳에서 자랐을 겁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 세기가 넘은 1704년(숙종 30), 충신 송상현과 절부 한금섬·이양녀 세 사람은 함께 정려(旌閭) 되었습니다. '정려'는 충신·효자·열녀를 기리는 의미로 그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旌門)과 비석을 세워 표창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정문은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에 세워져 있는데, 그에 대한 기록이 「송상현 한금섬 이소사 충렬문」으로 지금도 전하고 있습니다. 이 중 이양녀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열녀 이조이의 마을. 숭정 77년(1704) 갑신 5월일 정려할 것을 명한다."


송상현 한금섬 이소사 정려각




만약 이양녀가 양반집 남성이었으면 포로 생활의 경험담을 강항(姜沆)의 『간양록』과 같이 글로 남겼을 텐데요. 분명 절박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평민 출신의 여성인 이양녀는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 못했고, 그의 일생에 대해서는 남이 써주거나 구전되는 이야기 정도만이 조금 남아 있을 따름입니다. 여기서 저는 그 조각들을 짜 맞추어 이양녀의 삶을 재구성해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아무쪼록 금섬 말고도 이양녀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귀엽다'는 말의 속뜻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