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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마 그림을 남긴 왕들

옛날에도 자가용 인증샷을 찍었다

by 정영현

저는 조선시대 전공도 미술사 전공이 아닙니다만, 이성계가 함흥 토아동에서 왜구를 물리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이 이야기를 접하고 호기심에 정리해 보았습니다.


기원전 10세기, 중국 주나라의 목왕(穆王)은 8마리의 명마를 소유했다고 하는데, 이들을 '팔준(八駿)'이라고 합니다. 목왕은 이 8마리 말들이 끄는 마차를 타고 영토를 순행하고 혹은 곤륜산에 올라 여신 서왕모(西王母)를 만났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3세기 중국 동진의 왕가가 지은 일종의 야사집인 『습유기』에는 그 말들의 이름에 대해 '절지(絕地)'·'번우(翻羽)'·'초영(超影)'·'분소(奔霄'·'유휘(踰輝)'·'초광(超光)'·'등무(騰霧)'·'협익(挾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저작연대가 불분명한 일종의 소설인 『목천자전(穆天子傳)』에는 '적기(赤驥)'·'도려(盗驪)'·'백의(白義)'·'유륜(逾輪)'·'산자(山子)'·'거황(渠黄)'·'화류(驊騮)'·'녹이(緑耳)'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중국에는 예부터 이 8마리 준마를 소재로 삼아 한 폭의 그림을 그리거나 혹은 8폭으로 그려 병풍을 만들거나 하였고, 이를 〈팔준도〉라고 합니다.


7세기에 조성된 당나라 태종의 무덤에는 6마리 말의 부조가 새겨져 있는데, 이를 '소릉육준(昭陵六駿)'이라고 합니다. '십벌적(什伐赤)'·'청추(青騅)'·'특륵표(特勒驃)'·'삽로자(颯露紫)'·'권모왜(拳毛騧)'·'백제오(白蹄烏)'라는 각 말들의 이름과 함께 이 말들을 타고 올린 전과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6마리 준마를 그린 것을 〈육준도〉라고 합니다. 이런 〈팔준도〉 혹은 〈육준도〉는 말의 용맹한 기상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화제(畵題)로서 꾸준히 그려졌고, 한국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그려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20210730111405492.jpg 당태종의 〈소릉육준〉 부조


그런데 조선에서는 말 무리를 그림에 새로운 의미가 더해집니다. 바로 창업주인 태조 이성계가 6마리의 준마를 타고 갈아타고 남북의 이민족들을 물리쳤고, 후에 8마리 준마를 타고 나라를 안정시켰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세종 때인 1445년에 지어진 『용비어천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종은 이듬해인 1446년 호군 관직에 있던 화가 안견에게 태조의 〈팔준도〉를 그리게 하였습니다. 안견은 다음 해인 1447년 안평대군의 꿈을 묘사한 〈몽유도원도〉를 그린 걸로 유명하지요. 이때 팔준도를 그린 것은 아마 할아버지 태조의 기상과 위엄이 중국의 주 목왕이나 당 태종에 못지않다는 걸 드러내고, 전장을 달리던 말이 한가롭게 노니는 그림을 통해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목적으로 보입니다.


세종은 이 그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집현전 신하들에게 〈팔준도〉의 찬(贊)을 짓게 하였습니다. 훗날 사육신의 한 사람이 되는 성삼문도 이때 「팔준도명(八駿圖銘)」이라는 글을 지은 바 있습니다.(『동문선』 권50 및 『성근보선생집』 권2) 그리고 이 해에 과거시험의 일종인 중시(重試)를 치렀는데, "집현전에서 〈팔준도〉를 진상하는 전(篆)을 만들어보라"는 문제를 출제하기까지 합니다. 안타깝게도 당시 안견이 그린 〈팔준도〉는 소실되었고, 현재 전하는 것은 숙종 때에 재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선 중기에 이정형이 쓴 『동각잡기』에는 태조의 여덟 준마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설을 싣고 있습니다.(내용 중 [*]는 필자가 붙인 내용)


1. '횡운골(橫雲鶻)'은 여진산으로 [* 1362년] 납씨(納氏)[* 나하추]를 쫓아내고 홍건적을 평정할 때에 탔던 것인데, 화살 두 대를 맞았다.

2. '유린청(遊麟靑)'이라 이름한 것은 함흥산으로, [*1370년] 울라[兀刺] 산성을 취하고, [*1377년] 해주에서 싸우고, [*1380년] 운봉에서 승전할 때에 탔던 것인데, 화살 세 대를 맞았으며 31세에 죽자 석조(石槽)를 만들어 묻어 주었다.

3. '추풍오(追風烏)'는 여진산으로 화살 한 대를 맞았다.

4. '발뢰자(發雷赭)'는 안변산이다.

5. '용등자(龍騰紫)'는 단천산인데, [*1377년] 해주에서 왜적을 평정할 때에 탔던 것인데, 화살 한 대를 맞았다.

6. '응상백(凝霜白)'은 제주산으로 [*1388년] 압록강에서 회군할 때[*즉 위화도 회군]에 탔던 것이다.

7. '사자황(獅子黃)'은 강화 매도(煤島)산으로 [*1380년] 지리산에서 왜적을 평정할 때[*즉 황산대첩]에 탔던 것이다.

8. '현표(玄豹)'는 함흥산으로, [*1385년] 토아동(兎兒洞)에서 왜적을 평정할 때에 탔던 것이다.


464482403_8715202401929059_4802447792976258233_n.jpg 조선 태조 이성계의 〈팔준도〉


이후 세조는 1363년 자신이 아끼는 12마리 말을 소재로 〈십이준도〉를 그리게 하였습니다. 물론 세조는 자기 증조할아버지처럼 몸소 변경 지대를 누비며 외적을 물리친 적이 없고, 말들도 전장을 누빈 적이 없었습니다. 그냥 자신의 호방한 취미를 드러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찬문을 최항이 지었는데,(『동문선』 권51) 고향과 맞은 화살 대수까지 남아 있는 이성계의 팔준과 달리 말에 대한 설명도 두루뭉술한 편입니다. 그림은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나, 12마리 말의 이름은 남아 있습니다.


1. 정세표(靖世驃), 2. 유하류(流霞騮), 3. 이화리(梨花驪), 4. 옥영규(玉英虬), 5. 능공곡(凌空鵠), 6.축풍구(逐風駒), 7. 치운리(黹雲螭), 8. 등무표(騰霧豹), 9. 일경송(軼驚鴻), 10. 익비룡(翼飛龍), 11. 대야린(戴夜麟), 12. 조야기(照夜驥).


연산군은 1498년 준마 4마리를 가지고 〈사준도〉를 그리게 하였습니다. 그 기문은 성현이 지었는데,(『허백당문집』 권4) 말 이름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림도 전하지 않고요. 성현은 『용재총화』로 유명한 문필가로 연산군 시기에도 무난하게 고위관료를 역임했지만, 사후 몇 달 만에 갑자사화(1504)에 연루되어 부관참시(관을 파내어 시체를 참수하는 형벌)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연산군 역시 2년 후인 1506년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지에서 죽게 됩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른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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